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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리뷰] '그 여자의 작은 행복론'

중앙일보

입력

무슨무슨 '기념'자가 붙은 행사는 그 요란한 포장에 비해 내용물이 형편없기 십상이다. 기념 그 자체에 지나치게 무게를 둔 때문인데 결과가 시원치 않을 때는 배반감마저 든다.

가을 연극계에서도 그런 무대가 있다. 개중에는 아예 '기념' 타이틀이 없었으면 차라리 나았을 것같은 안타까운 작품도 있다. 그런 혼란스런 풍경 속에서 차범석의 극작 50주년 기념작인 '그 여자의 작은 행복론'은 단연 돋보인다.

이 작품은 라신의 '페드라'를 연상시킨다. 의붓아들을 사랑한 어머니의 비극. 첫 남편에 대한 주인공 정숙(손숙) 의 그리움이 그의 아들(친자식은 아니다) 로 전이(轉移) 되면서 빚어지는 중년여성의 비극적 종말(자살) 을 그렸다.

여성의 시각으로 고정시켜 보면, 중년 여성의 자아상실과 정체성 찾기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 가족사(事) 로 환치시켜도 될만큼 보편적 가치를 지녔기에 폭넓은 가족극의 범주에 넣는 게 옳겠다.

이 작품은 우리 연극에서 드물게 다룬 모자(비록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간의 부도덕한 관계를 다뤘지만 결코 통속적이거나 잡스럽지 않다.

대신 그 자리에 팽팽한 긴장과 절제미로 세워진 인간의 원초적인 사랑과 비극이 위치한다. "진작 소리없는 소리를 들을 줄 알았어야 했다"며 본연의 모성을 회복하고 자살을 택하는 정숙의 태도에서 이 연극의 분명한 지향점이 보인다.

연극의 성공요인은 여럿이다. 일등공신은 물론 손숙의 연기다. 첫날 공연을 본 한 연출가는 "지금껏 본 손숙의 연기 중 으뜸"이라며 흥분해서 말했다. 최근 손숙(57) 의 연기에는 타성(惰性) 이 끼어 어느 작품을 보듯 한가지였는데, 이 작품은 그걸 극복했다. 이순(耳順) 을 앞두고 연기론을 새로 배웠을까. 아마 그건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의 변신을 가능하게 한 것은 역시 극작과 연출의 힘이다. 극작가 차씨는 자신의 나이보다 20년 이상이나 젊은 감각으로 여심(女心) 을 읽어내어 손숙의 혼을 헤집어 놓았고, 연출(임영웅) 은 묵직한 주제의식으로 그녀를 흔들리지 않게 조련한 것이다.

연극은 극작.연출.연기의 3박자가 빚어낸 행복한 삼중주다. 차씨의 극작 50주년은 이 작품으로 길이 기억될 만하다. 25일까지 산울림 소극장. 02-334-5915.

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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