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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4·26 이 대통령 하야성명에 관하여|김정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1960년4월26일은 전 이승만 대통령이 그 때의 정정을 참작하여 스스로 대통령직에서 하야할 것을 결심하시고 이 결심을 만천하에 성명 하신 근대사의 중대한 역사적 한「페이지」를 장식한 의의 깊은 날이다. 이미 이러한 중대사는「매스컴」에 의해서 공개되고 또 여러 사람에 의해서 여러 방법으로 발표 또는 보도되어온 바이어서 그 경위와 동기에 대해서 추측이 가는 일이지만 그 일이 생긴지 6연이 지난 지금에 와서 그 후 금일에 이르기까지 침묵을 지켜오던 내가 그날의 광경을 직접 집필하는 이유는 신문사의 요청도 있었거니와, 그간 보도 또는 발표된 내용에 관해서 그 당시 그 엄숙한 역사의 전환점을 둘러싸고 갖가지 억측과 일부사실의 왜곡된 내용이 구구하게 유포되고 있기 때문에 직책상 당시 그 중대한 역사적 전환시기에 시종 참여 내지는 지켜 서게 되었던 진실의 목격자였고 증인이었기에 이러한 중대사가 우리나라 민주정치발전의 근대사에 있었던 사실 그대로가 후세에 올바르게 기록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나」의 의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회고하건대 이 같은 이승만 박사의 중대 단안은 3·15선거로부터 더듬어야 하겠지만, 그것은 정치적인 문제이고 또 제한된 지면사정상 생략키로 하고 우선 4월26일과 직접관계가 깊은 4월25일부터 일어난 그 진상 그대로를 기술하고자 한다.

<4월 25일>
서울시내 전대학생들이 총궐기하고 나선 4월19일 세칭 4·19「데모」사태 이후 전 국무위원들은 중앙청 내 국무회의실에서 침식을 같이 하며 당시의 사태를 수습하는데 공동 노력하였고 나도 역시 국방부에 있지 않고 다른 국무위원과 같이 여기서 계엄사령부의 지휘 및 보고를 받았다.

<1주만에 국방부로 또 교수데모 급보>
마침 이날 정부는 이미 비상계엄령 선포사실을 정식으로 국회에 포고하였거니와, 국회에서는 그때의「데모」사태가 많이 평온해졌다는 이유로 비상계엄령에서 경비계엄령으로 바꾸기로(4월26일 상오5시를 기해서) 결의하였었다.
이러한 국회결의도 있었고 또 사실상 시가도 매우 평온 안정된 상태이었으므로 나 의 제언으로 각 부 장관은 각부에 돌아가서 집무하게 되어 국무회의실 옆에 설치하였던 국방부의 임시 연락기관도 철수시키고 나 자신도 그날 하오 3시1주일만에 국방부로 돌아갔다. 돌아와서 오래간만에 부내직원과 그간 밀렸던 정무를 처리하고 있던 중 하오 5시반경 계엄사령관 송요찬 장군으로부터 교수들이「데모」를 하고 있다는 전화보고가 있었다.
잠시 후에 제2보고가 있었고, 드디어 제3보고에는『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데모」를 하 고 있는 교수단을 구경하고 있던 군중들이 돌연 이기붕 의장 댁을 습격할 태세로 서대문 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 수는 약 2만 명으로 추산됩니다』라고 하기에 이 보고를 접하자「나」는 송 장군에게『이 의장 댁 경비를 강화하시오』하고 수화기를 놓자마자 경무대로 향했다.

<구경하던 군중이 돌연 서대문으로>
그러나 시청 앞, 광화문 쪽이 군중들로 막혀 이태원, 장충단, 동대문 쪽으로 돌아 삼청동 쪽으로 해서 석양이 비친 경무대로 들어갔다.
경무대에서도 하오까지 평온하였던 까닭으로 1주일간의 숙직의 피로를 풀기 위해 전원이 귀가하고, 그날의 숙직인 박찬일 비서관만이 홀연히 앉아 있었다. 경비실을 통하여 이 의장댁은 만여 명이나 되는「데모」군중의 습격을 받았으나 이 의장 내외는 후문으로 피신하였다는 보고가 있었다.
야간이 되자 총격은 간혹 있었으나 군중은 해산했다는 보고를 받고 한적한 경무대 안에서 박 비서관과 단둘이 얘기를 주고받고 하였다.

<대통령은 잠들고 대대적 데모 정보>
밤 10시 반경에 송 사령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정보에 의하면 명일 대대적인 규모의「데모」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국회의 결의로 명일(4월26일) 상오5시를 기하여 경비계엄으로 바꾸게 되면 언론·집회통제에 강권을 행할 수 없으므로 비상계엄을 연장하도록 대통령 각하의 재가를 받아 주십시오』하고 보고 겸 건의를 하기에『대통령 각하께서는 벌써 주무시니 결재 받기가 어렵고, 내 생각으로는 경비계엄령으로써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가 있을 것이고, 더구나 국회의 결의를 번복하기가 힘이 드니 좀더 알아보시는 것이 어떻겠소』하고 답하며 일단 전화를 끊었으나 약 1시간 후에 또다시 송 사령관으로부터『더 자세히 정보를 종합해보니 명일「데모」에 참가하는 사람이 30∼40만이나 되는 것 같습니다. 계엄사령부 참모들도 꼭 비상계엄령을 연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견입니다』라고 하면서 당시 육군참모차장 김종오 중장(고인이 된)과 법무감 김완룡 소장을 차례 차례로 바꾸게 하고 이 두 사람이 다 같이 전술한 송 장군의 보고내용을 보충 및 되풀이하면서 심각한 어조로 같은 의견을 말하고 있었는데 마침 박찬일 비서관이 전화로 내가 말한 대로 지금 대통령이 취침 중이라는 것을 전달했는데도 계속 청해오므로 취침 중이신 대통령께 말씀드리기도 어려웠고 해서 그 이튿날 아침 대통령 재가를 받을 생각으로 국방장관의 독단으로서 상오l시를 기해서 다시 비상계엄을 연장한다는 내용의 방송을 하게끔 지시했었다.

<4월 26일>
경무대 대기실에서 박찬일 비서관과 잠깐 잠이 들었다가 깨어보니 6시반이었다. 경비실에 가서 밖의 공기를 물어보니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이었고 세면을 하고 중앙청으로 내려오면서 직접 두루 살펴보니 역시 아침거리는 조용하여 매우 평화스러웠다. 그후 국무회의실에서 식사를 하고 있을 때에 소식을 들었는지 국무위원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평화스러운 아침 들어맞았던 정보>
아침 8시가 지나서 심상치 않은 정보가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9시 가까이 되니 종로·을지로 일대가 사람으로 덮여 군중이 서서히 시청 앞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랐던 전야의 계엄사령부의 정보가 현실로 닥쳐오니 걱정이 태산같고, 우선 경무대로 가기로 했다.

<매카나기 미 대사 대통령 면담 부탁>
옆에 있던 홍진기 장관을 보고 같이 가자고 하니, 자기는 이미 내무장관을 사직하고 이호씨가 새로이 임명되었으니 가기가 어렵다고 하기에 타 장관에게도 권해 보았더니 우선 국방장관만 가보라는 것이었다.
비상계엄령 연장에 관한 기안지를 손에 들고, 국무회의실을 나와 계단을 내려오고 있을 때 총무처직원이 미국대사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고 하기에 도로 가서 수화기를 들으니, 당시「매카나기」주한 미국대사가『이 대통령을 뵈옵고자 하니 귀 장관이 알선해 주시기 바랍니다』고 말하기에『왜 직접 경무대에 연락하지 않고, 나에게 부탁하는거요?』하니『수차 경무대 비서실에 연락하였으나, 승낙의 전언이 없읍니다』고 했다.『나는 지금 대단히 바쁘니 기회를 봐서 진언을 해 보겠소』하고 경무대로 향했다. <계속><경어·경칭은 본사서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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