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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북한·도봉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서울의 북방을 병풍처럼 둘러싼 북한과 도봉은 서울의 후광이며 기운이다. 오늘의 서울이 여기에서 비롯해 한양이 되었고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여기에다 성을 쌓고 도읍을 정했다.
고구려를 떠나 남하하던 온조왕이 북한산에 올라 바라보매 발아래 흐르는 한강과 기름진 땅, 멀리 보이는 서해를 지닌 북한산은 천연의 성이며 하늘이 준 도읍이라 준험한 암봉이 늘어선 북한산의 중간점 우이동에다 내성을 쌓고 마한에 사자를 보내어 동맹을 청했더니 주권이나 영토관계가 분명치 못했던 당시의 마한이 이를 수락, 북방의 얼마간 영토를 나누어주어 백제를 건국하였던 것이다.
한양이라 함도「한산」의「남」이라는 뜻이라니(양은 남과 같다고 함=육당)북한은 또한 서울의 어버이 됨에 족하다 하겠다.
백제가 문주왕에 이르러 공주로 도읍을 옮긴 후도 북한산은 항시 군사상의 요지가 되어 영토를 달리 할 전투 때마다 이 산을 서로가 다투어 지켜왔다.
이조 초기 개성으로부터의 유도도 또한 북한 때문이며 숱한 외국의 침략에도 북한은 서울의 방패 노릇을 해 준 것이다. 이렇듯 지난 2천 여 년의 흥망과 직결되었던 이 산은 또한 근대에 이르러 한국 산악운동의 온상지가 되었다. 수도 가까이 이렇게 아름답고 험준하고 변화 많은 산을 가진 나라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외국의「알피니스트」들이 와 보곤 암벽조건의 변화와 암질 및「코스」의 다양성에「원더풀」을 연발하며 서울의 악인들을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부러워한다.
이 산 암장을 완전히「마스터」하면 어떤 악조건의 암벽을 만나도 거뜬히 해치울 수 있을 만큼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1백 여 개의 암등「코스」가 있고 아직도 젊은「알피니스트」에 의해 새로운「코스」가 개척되고있기는 하나 이 산을 오르는 모든 악인들은 처음 이 산의 개척을 위해 젊은 힘과 열과 그리고 생활까지를 버린 선배악인들의 노고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40년 동안 이 산은 30여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비교적 훈련된「멤버」들이거나 노련한 「멤버」들이 다니던 일제시대에는 조난이 잦지 않았다. 그 때만해도 산악회의 입회는 무척 까다로웠고 질서 있는 교육과정을 겪어온 탓으로 산을 산으로 대할 줄 알았었고 따라서 희생자는 거의 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해방 후 그러한 전통적인 질서가 무너지고 춘추전국시대처럼 산악의 맹장들이 홍길동처럼 나타나 함부로 산을 어지럽히다 하나씩 둘씩 쓰러져 간 것이 ∞여명이나 된다.
1946년7월 도봉산 주봉(기둥처럼 선바위)을 직등하던 양정고 등 산악부원이 떨어져 즉사한 것을 처음으로 1957년 9월25일엔 미국유학을 떠나기에 앞서 송별 등산 갔던 황득복 군이 백운대 북서면에서 떨어져 죽었다.
61년9월엔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송영호 군의 실종사건이 있었다. 전국 각지의 모든 산악인이 총동원, 북한산 백운대 일대를 밤낮없이 뒤졌으나 허탕, 3일 만에야「욱모정」근처의 산포도 나무 덩굴 밑에서 찾아낸 바 있다. 4·19후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송 군을 찾아 나서는 산악인들의 단결과 희생정신에 감동한 당시 대통령은 간부들을 초청했고 신문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남자들뿐만 아니라 아리따운 여인의 영혼도 이들에 끼여있다.
1948년 한국은행 은행원 모 양이 백운대를 내려오던 중 골바람이 치솟아 오는 통에 위로 치켜든「스커트」를 붙잡느라고 취한 무의식적인 동작이 줄을 놓게 하였고 급기야는 저승으로까지 가고 만 것이다. 여성의 등산에 좋은 교훈을 남긴 셈이다.
주말이면 마치「텍사스」의 주점거리와도 같아진 요즈음은 더 많은 사고가 내포되어 있고 아름답던 자연과 산의 인정들은 함부로 파괴되어가고 있어 악인들은 하루빨리 이 산이 국립공원이 되고 산악별찰 제도가 채택되어 산을 지키고 등산을 빙자, 타락행위를 일삼는 10대 소년소녀들이 선도되길 바라고 있다.
함부로 운자에게 이렇듯 벌을 내리면서도 산을 사랑하는 사람에겐 한없는 품을 열어주는 북한은 서울 시민을 위해 내려주신 조물주의 최고최대의 선물이라는 것을 명심해서 온 힘을 다해 보호하고 다듬어야 할 것이다.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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