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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금과 정만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술에 취한 정만서가 어느날 삼경의 밤거리를 걷다 순라꾼에 들켰다. 통금을 알리는 인정소리가 울린지 오래다. 붙잡히기만 하면 관가에 끌러가서 곤욕을 당할 것이다. 그렇다고 익살꾸러기 정만서가 만만하게 그냥 잡힐리는 없다. 순라꾼이 가까이 오자 얼른 남의 집담에 뛰어올라 몸을 걸쳤다. 『웬 사람이요』라고 순라꾼이 묻자, 그는 『사람이 아니라 빨래요!』라고 대답했다. 『아니 무슨 빨래가 말을 하오』그러자 그는 또 태연하게 『급해서 통째로 빨아 넌 빨래요』라고 했다는 것이다.
정만서는 『한국적인 웃음』을 남긴 상징적인 야인이었다. 그래서 그 웃음을 뒤집어보면 『한국인의 슬픔』도 깃들여 있다. 그러기에 『자기를 통째로 빤 빨래』라고 주장한 정만서의 그 익살은 통금 속에서 살아온 한국인만이 공감할 수 있는 「유머」인 것이다.
정만서의 시대는 갔지만, 그러고 지금은 근대화를 위한 도약 단계의 시대라고들 하치만 한국의 밤은 예나 오늘이나 통금의 가시철망에 묶여있다. 「인정의 중소리」가 「사이렌」 소리로 바뀌고 순라꾼이 순경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억지로 자위하자면 이조 시대의 통금 시간은 이경(밤10시께)이었는데 지금은 12시이니까 2시간 가량의 자유를 더 누리는 셈이다. 하지만 지금도 통금을 위반한 20세기의 시민들은 자기를 빨래라고 말한 정만서의 기지를 아쉬워하고 있다.
워낙 뿌리깊은 전통이라 그럴까? 통금 해제를 하는 것이 꽤 힘이 드는 모양이다. 이번에는 서울시에서 통금 해제를 위한 장단점의 기초 조사를 서울대 행정 대학원에 의뢰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통금해제가 치안·사회·산업 등에 미치는 영향을 따져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주객 전도의 사고 방식이다. 발에 구두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구두에다가 발을 맞추려는 격이다. 통금의 장단점이 아니라 그것이 원법이냐 아니냐부터 따져 보라. 세계의 어느 자유 국가에 아직도 통금의 괴물이 남아있는가를 따져 보아라. 정만서의 빨래 이야기가 아직도 싱싱하게 우리를 웃기는 한 근대화의 길은 멀고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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