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홍구의 거리문화 읽기] 시멘트 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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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대체로 우울하다. 테러와 전쟁, 불경기 때문에 우울한 것은 아니다.

그런 일들은 개인적으로 직접 맞닥뜨리기 전에는 아무런 실감이 나지 않는 일이니까. 정치.경제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다. 원래 세상에 좋은 정치나 권력이란 없고 더 나쁜 정치나 덜 나쁜 정치가 있을 뿐이니까.

나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족 모두가 일종의 우울증을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우울증은 인간이 게으르지 못한 데서 오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은 게으를 수 있는 만큼 게으른 게 나은 것 같다.

필요 이상으로 부지런히 움직이며 많은 것을 생산하고 소비하게 만드는 현재의 시스템들은 분명히 죄악이다. 인류라는 종 전체의 죄. 이런 따위의 별 쓸모없는 생각을 하며 길을 가다 길 바닥에 놓인, 시멘트를 갠 흔적이 있는 플라스틱 통을 본다. 그 순간 모든 생각이 바뀐다.

음, 진짜로 심미적인 것은 현실 속에 있구나. 그러니까 제도화 된 예술작품이란 역시 가짜구나, 진실이 아니구나 따위의 생각을 하게 된다. 다시 찬찬히 시멘트 통을 들여다본다. 시멘트를 개는 데 쓰인 둥그런 플라스틱 통이 있다.

그 안에 손잡이가 달린 바가지가 놓여 있는 것이 전부다. 아무런 장식도 기교도 없다. 단지 원래의 모습은 보이지 않을 만큼 노동의 흔적, 시멘트의 더께가 모든 것을 덮고 있다. 그뿐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야말로 예술에는 절대 없는 그럴 듯한 뭔가가 있다. 노동의 흔적이 쌓여 있기 때문이라고, 1980년대식으로 말하기는 싫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도 없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일을 한 자취가 무작위적으로 쌓여 그 무엇인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무기교의 기교, 대교약졸(大巧若拙) ? 물질의 힘? 이름을 붙이려 하다니 시멘트 통이 웃을 일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이런 것들을 만들어 낼 수도 있는데 그 힘을 엉뚱한 데 쓰고 있는 것이다. 테러와 전쟁, 정쟁과 증오.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시스템은 결국 증오와 파괴를 생산하는 데 바쳐지고 있다. 게다가 그 시스템들은 계속해서 증식되지 않으면 파멸에 이른다. 경제성장률은 증가해야만 하고 효율성은 높아져야만 한다.

세계는 고사하고 자신도 통제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인간. 그래서 마치 대홍수에 떠밀려 가는 가축떼처럼 쓸려가는 인간. 이런 생각을 하니 다시 우울해진다.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니 우울해질 필요까지는 없지만 우울하다.

그리고 시멘트 통을 다시 본다. 이 일을 한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지만 인간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므로 시멘트 통과 바가지와 시멘트에 고개를 숙이기로 한다. 사람 아닌 어떤 것에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김수영의 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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