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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과 젊음의 대화|학사주점 낙서전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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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저녁 어스름이지면 서울 광화문 한 모퉁이에서 떠들썩해지기 시작한다. 함성을 울리듯 젊은이들이 자유 분방하게 목을 터놓는다. 「학사주점」에서 그들은 술을 마시는 것이다. 느긋한 분위기로 설렁거리는 곳. 네벽엔 앉아서도 손이 닿을 만한 높이로 백지병풍을 둘렀다. 여기에다 그들은 한마디씩 갈겨쓴다.
기분 나는 대로,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낙서」지만 참말「낙서」들이다. 그 속엔 무의미한 기록이 있고, 생활의 한 「고십」이 있고, 세상의 만풍이 있고, 젊음의 욕구불만과 분수가 솟구친다. 작년 4·19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낙서는 무려 2만8천5백43종. 「60년대 학사회」(60년도산 학사들의 연구단체)는 그 낙서들을 모아 18일부터 서울 중앙 공보관에서 「낙서전」을 열고 있다. 전시장엔 즉석 낙서판도 있는, 유쾌한 「쇼」였다.
『사랑하는 이여! 그대들, 여기서 쉼은 밝아오는 새벽을 기다림이니…』 「한 나그네」의 서정이 낙서전의 서장으로 등장한다. 『할 일 없어 여기서 술 먹고 지랄한다』누구의 독백인지 가시가 돋았다. 하도『할 일이 없어』술이나 마신다는 체념인가. 『우리가 술을 마시는 것은 마시고 싶어 마시는 것은 아니외다. 다만 비어 있는 가슴 속 공백을 메우기 위함이외다』 「공허의 세대」인가. 『어쩌다 태어난 것이 비오는 날에 태어난…』누구의 운명론. 『분노의 하루를 이토록 어이없이 한잔의 대포로 푼다는 것은 이지의 배리라는 것이다』대개는 고독과 공허와 분노와…그런 이유로 젊은이들은 술들을 마신다. 「낙서」중엔 「사랑」에 의한 충동이 대부분이다. 어느 청년의 「사랑」10장은 절로 웃음이 난다. 사랑이란 『①괴로운 것 ②몹쓸 것 ③허무한 것 ④병신 같은 것 ⑤노예 같은 것 ⑥역사의 슬픔 ⑦달콤하다 쓴 것 ⑧김이 새는 것 ⑨고독의 병균 ⑩될대로 되라!』라는 식의 정의다. 『모든 여인들을 위하여 축배를 드는』젊은이도 있다. 그는 7배를 들었다. 그 중 제3배는 「패션· 모델」을 위해-. 그 「축배성」은 『모든 여인들은 다리에 털이 나라』고 일소한다. 누가 옆에다 조그만 글씨로 「악한!」이라 규탄했다.
한 「연애」학도는 회의한다. 『날로 변하는 과학문명에 비해 사랑을 주제로 하는 연애철학은 어느 정도 진전했을까?』「이성인 연합회」라는 것도 있다. 그 회장은 가라사대 『남자는 자신의 능력을 즐기고, 여자는 자신의 미모를 즐긴다』-한국의 「링컨」을 자처하는 청년은 『사나이의 사나이에 의한 사나이를 위한 정부』를 주창한다. 깨알같은 글씨로 「여자 아님」이라는 주가 붙었다.
주객 속에는 여대생도 없지 않다. 낙서의 주인공으로 「숙」「자」「애」「희」「영」「미」등 여성격 이름자들이 눈에 띈다. 젊은 세대의 한 단면이다. 한 여대생은 곱살스러운 글씨로 시 한 줄을 썼다.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모두 가릴 수 있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감을 밖에.』
어떤 「숙자」의 『작작 좀 마시세요』라는 충고문은 어느 만큼의 주량에 대한 경고인지…. 「낙서전」한구석에서 벌어진 논쟁은 젊은이들의 긍정적·부정적 풍모를 대변한다. 『죽는 것 보단 사는게 좋다. 사는 것 보단 노는게 좋다』그 「명제」에 어떤 청교도(?)가 일침을 놓는 것이다. 『너는 없어지는 게 상수다』-.
「정담」낙서는 아주 드물지만, 대개는 우울한 격조다. 『고난의 운명을 따라, 역사의 능선을 따라 이 밤도 허우적거리는 겨레가 있다』누구의 비탄이다. 『사랑해 보렴. 민족과 역사의 「네온사인」을!』 또 누구의 민족애. 『태어날 때 울지 않는 놈은 여덟달 반. 그래서 8·15는 덜 된 달인가?』그날은 8월15일이었던가 보다.
「대한민국은 남녀 공화국」이라는 「양성 민주주의자」(?).
맵고, 익살스럽고, 통쾌한 정담은 별로 없다. 기지 미달인지, 긴장 과잉인지.
「김삿갓」의 낙서 시는 세계적인 격조마저 갖고 있다.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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