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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빼면 시체? 노장 디자이너가 사는 법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저자: 폴 스미스,올리비에 위케르출판사: 아트북스 가격: 2만원

클래식한 슈트에 보라색 실크로 감싼 단 처리, 최고급 패브릭으로 만든 셔츠에 커다란 꽃 장식…. ‘영국적 디자인’의 정체가 궁금하다면 폴 스미스의 옷을 보라. 격식에 위트를 더하는 방식은 그만이 할 수 있는 장기요, 영국 패션의 진가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 “영국식 유머란 깍듯이 예의를 갖추고 나서야 비로소 먹힌다”는 그의 말처럼.

‘유머 감각’이 교육의 힘은 아니었다. 그는 제대로 패션을 배운 적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심한 난독증을 앓았고, 학교에선 ‘늘 떨어지는 학생’이었다. 결국 열다섯 살에 학업을 포기했다. 친구의 옷가게 일을 도우며 ‘장사’를 경험했고, 동네 퍼브에 드나들며 미대생들과 어울리면서 예술과 패션을 빨아들였다. 고향 노팅힐에 가게를 연 건 1970년. 6년 뒤 처음 컬렉션을 시작했다. 그는 이제 70개국에 3000여 명의 직원이 일하는 글로벌 패션 기업을 일궜다. 그리고 영국 대표 디자이너답게 여왕 수출공로상(95)에 이어 기사 작위(2000)까지 받았다. 뭣보다 남다른 건 세계적인 패션하우스들 상당수가 거대 자본에 넘어가 휘청거리는 가운데에서도 독립 브랜드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독학으로 배운 패션에 내공을 쌓기까진 나름의 방식이 있었다. 평범하고 지루하고 무거운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재미’를 찾는 것. 여기엔 11살 이후 늘 갖고 다니던 카메라가 한몫했다. 15도쯤 비딱하게 모양을 낸 사각 창문, 주근깨가 가득한 여인의 등, 파운드(영국 화폐) 표시를 컬러풀하게 장식한 건물 등이 렌즈에 잡혔다. ‘목격’이 안 되면 ‘창조’도 감행했다. 직접 드레스 셔츠에 치마를 입고 발레리나처럼 포즈를 취하거나, 색색의 중절모를 머리 위로 계속 쌓아 올려 스스로를 피사체로 삼았다. 그 노정은 ‘시각 일지’에 차곡차곡 쌓였다.

신간 『폴 스미스 스타일』에서는 이 같은 노장 디자이너의 에너지 넘치는 일상이 그대로 담겨 있다. 직접 찍은 사진은 물론 수시로 기록한 노트, 낙서, 스케치와 함께 걸맞은 사색의 글도 적혀 있다. 지금껏 삶에서 의미 있었던 58개의 단어를 골라 이를 알파벳 순서대로 분류했다. 가령 G는 Gifts(선물 혹은 재능)·O는 Office(사무실) 식이다.

내용은 자전적 스토리와 디자이너로서의 철학이 진지하게 묻어나지만 위트는 여전하다. 일례로 LOVE. 그는 보통 사랑을 얘기하지 않는다. 되레 “내 팀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들의 다양한 관점에 더 관심이 있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LOVE의 위치를 바꿔 VELO(자전거)로 재조합해 티셔츠를 선물한 친구의 예를 든다(아내 폴린은 P(Pauline)에서 따로 언급하는 센스). 또 디자이너에게 가장 중요한 패션쇼에 대해서는 “쇼가 시작되는 순간,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어서 빨리 쇼가 끝나 밖에 나가 한잔 하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그의 나이 이제 예순다섯. 하지만 그는 아직도 매일 웃음이 터져나오는 뭔가를 목격하고, 일상의 관찰을 ‘재미난 활동’이라 여긴다. 책 속에는 ‘매일매일 아이디어를 얻자’ ‘기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자’ ‘영감은 당신의 온 주변에 있다’는 구절도 등장한다. 한 해를 시작하는 지금, ‘즐거운 인생’을 꿈꾼다면 그냥 넘겨 들을 수 없는 조언들이다.

글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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