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이 업체에 청첩장 뿌려 받은 축의금은 뇌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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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컨설팅업체인 A사 인사팀장 박모씨는 2010년 12월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산업안전과장 김모(57)씨로부터 ‘딸의 결혼식에 참석해 달라’는 청첩장을 받았다. 김씨는 이 업체의 안전지도·점검을 맡은 감독 책임자라서 박씨로선 ‘잘 보여야 하는’ 사람이었다. 박씨는 불현듯 보름 전 김씨의 부하 직원이 산업안전점검을 나와 한 말이 생각났다. “칸막이 공사 때문에 석면이 기준치보다 많이 나왔다. 과태료가 5500만원은 나올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박씨는 노동청으로 찾아가 김씨에게 “과태료를 낮춰 달라”고 사정했다.

 그러자 김씨는 “성의를 보이라”고 은근히 돈을 요구했다. 사흘 뒤 박씨가 김씨에게 300만원을 건넸고 과태료 처분은 취소됐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청첩장이 오자 박씨는 결혼식장을 찾아 축의금 10만원을 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부장 이원범)는 감독 대상 업체 측으로부터 축의금을 받아 챙기고 수십 차례 골프·현금·식사 접대를 받은 혐의(뇌물수수 등)로 기소된 김씨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벌금 3500만원과 추징금 1600여만원을 선고했다고 3일 밝혔다. 재판부는 김씨가 업체 관계자 45명으로부터 10만~30만원씩 총 530만원의 축의금을 받은 것을 뇌물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김씨는 개인적 친분관계도 없는 업체 관계자들에게 일률적으로 청첩장을 보냈다”며 “업체 관계자들이 축의금을 보내지 않을 경우 입게 될지 모르는 불이익을 우려하거나 업무상 편의를 기대해 축의금을 보낸 것으로 미뤄 뇌물이 맞다”고 밝혔다.

 법원 관계자는 “축의금 액수가 과도한 경우 뇌물로 본 판례가 있으나 10만~30만원 정도의 축의금을 뇌물로 판단한 것은 드문 일”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광주지법은 2010년 11월 사업가 차모씨 등 3명으로부터 딸 결혼식 축의금 명목으로 900만원을 받은 이모(71) 전 군의원에게 “축의금으로 보기에 지나치다”며 징역 6월에 추징금 900만원을 선고했다. 대법원은 직무와 관련된 사이라고 해도 개인적인 친분관계에 따라 주고받은 축의금에 대해선 뇌물로 인정하지 않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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