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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쓸 노인 복지 예산, 일자리·재교육에 집중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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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인구 고령화가 경제에 재앙이 될 거란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지금의 은퇴·고령자들은 과거와 다르다. 일할 의욕과 건강이 넘치고, 경륜과 재능도 뛰어나다. 앞으로 고령자들이 오래 일함으로써 경제성장을 촉진하게 될 것이다.” 중앙일보 특별취재팀이 만난 각국의 은퇴설계·고령화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다만 “계속 일하는 문제를 개인에게 맡겨둬선 안 되며 국가와 사회가 재취업·교육훈련 인프라를 탄탄하게 깔아주는 게 전제조건”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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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팀이 인터뷰한 마크 프리드먼 미국 시빅벤처스 대표는 고령화 문제를 인적자원의 활용이라는 역발상으로 접근해 베이비부머들의 재취업·창업·봉사활동 등을 지원하는 사회적 기업가다. 아키야마 히로코(秋山弘子) 일본 도쿄대 고령사회종합연구기구 특임교수는 일본에서 고령화 문제가 가져온 각종 현상을 심층 연구한 전문가다. 우재룡 삼성생명 은퇴연구소장은 한국형 은퇴모델을 연구·설계하는 전문가로 ‘일하는 노후’의 전도사로도 통한다. 이들 전문가와 개별 문답 내용을 주제별로 정리했다.

 -많은 나라가 고령화 때문에 경제가 장기 불황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마크 프리드먼=그건 단견이다. 지금의 65세 이상 고령자는 과거의 고령자와 다르다. 65세가 고령의 기준이 된 것은 19세기 독일제국의 총리였던 비스마르크가 공공연금을 설계하면서 지급연령을 그렇게 정한 데서 비롯됐다. 그런데 당시 독일의 평균수명이 46세였다. 65세는 거의 저세상 사람이었다는 얘기다. 지금은 어떤가. 곧 100세 시대가 열린다. 65세면 청춘이다. 더 이상 노인이니, 고령자니 하고 부르는 게 어색하다. 이들은 계속 일할 의지가 있고 능력도 있다. 이들이 일을 계속하는 한 경제에 나쁜 영향은 있을 수 없다.

 -일본은 고령화 때문에 잃어버린 20년이 진행 중인 것 아닌가.

 아키야마 히로코=고령화를 일본의 장기 불황을 초래한 주범으로 보는 것은 곤란하다. 일부 영향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된 요인은 1980년대 너무 심했던 거품이 일시에 꺼진 점, 정부가 정책 대응을 잘못한 점, 기업들이 혁신 노력을 게을리한 점 등이라고 본다.

 -한국의 베이비부머(1955~63년생)도 본격 은퇴 시점을 맞았는데.

 우재룡=한국의 베이비부머는 산업화를 완성시키고 민주화도 일궜던 경제발전의 주역들이다. 이들은 앞선 세대에 비해 전문화된 경험과 기능을 많이 축적했다. 최근 삼성생명 은퇴연구소가 50대 베이비부머를 대상으로 설문조사해 보니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무려 91%가 계속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과거 비슷한 설문 결과는 70%대였다. 일을 안 하면 생계가 안 된다는 절박함도 일부 반영된 것이겠지만, 경제에 나쁜 신호는 아니다.

 - 고령자들이 계속 일하면 젊은이들의 일자리를 빼앗게 되는 것 아닌가.

 프리드먼=크게 봐서 활동영역이 다르다고 본다. 고령자들은 과거 경험의 연장선에서 젊은이들이 도전하기 힘든 일들을 할 수 있다. 또 젊은이들의 일을 측면 지원하거나 코칭하는 일을 새롭게 꾸릴 수 있다. 인구 고령화 자체가 새로운 일자리의 보고가 될 가능성도 크다. 베이비부머의 소비성향은 과거 노인들과 다르게 왕성하다. 건강한 고령자들이 불편한 고령자들을 돕는 사회 서비스 일자리도 많이 생길 수 있다.

 아키야마=일본도 고령사회가 급진전된 초기에는 세대 간 갈등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고령자들이 계속 일하는 풍토가 자리잡으면서 상호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 고령자가 일을 해야 사회가 존속할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100세 시대에는 ‘전원 참가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 그래야 복지비용도 줄어든다.

 -한국의 경우 고령자 대상의 일자리가 턱없이 부족하고 임금도 낮은 게 문제로 지적되는데.

 우재룡=길게 보고 풀어야 할 숙제다. 유교적 관습, 고령자에 대한 편견, 노조 문제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일단 고령자 스스로 체면에 얽매이지 말고 일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임금에 대한 눈높이도 낮춰야 한다. 과욕 때문에 경험도 없는 자영업에 뛰어들어 낭패를 보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정부의 도움도 필요하다. 정부가 어차피 써야 하는 노인복지 예산을 생산적인 고령자 일자리와 재교육 등 분야에 집중 투입하는 지혜가 요구된다.

 -고령자들의 적정 은퇴 시점은 언제인가.

 프리드먼=미국에선 75세 정도가 적당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대학 졸업 뒤 25년 정도 일한 뒤 50세 인생 후반기를 맞아 새로운 분야에서 25년 정도 ‘앙코르 커리어’를 가진 뒤 75세쯤 은퇴하는 스케줄이다. 전반생의 일자리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강요된 선택’이었다면, 후반생의 일자리는 삶의 의미를 살리는 ‘자유 선택’이라 하겠다.

 아키야마=일본에는 80대 이후에도 계속 일하는 고령자가 많다. 체력이 떨어지는 연령이 되면 점차 일하는 시간을 줄여 나간다. 각자 능력에 따라 시간제, 주 1~2일 근무제 등 다양한 근로 형태를 택한다. 중요한 것은 하루 한 시간이라도 일한다는 의지다. 집에만 있으면 신체와 뇌의 기능이 떨어져 병원 출입만 잦아진다.

 -정부가 나서 강제로 정년을 연장해주는 문제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프리드먼=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본다. 사실 미국에는 정년이란 개념이 없다. 그래도 기업들 스스로 능력 있는 고령자들을 오래 붙들어 두려고 노력한다. 파트타임 탄력근무제와 임금피크제 등 유연한 고용 시스템이 갖춰진 덕분이다.

 아키야마=일본은 올 4월부터 법정 퇴직연령을 현행 60세에서 65세로 연장하게 된다. 그러나 제도를 경직되게 운영해선 곤란하다는 견해가 많다. 능력과 근로의욕을 가진 고령자들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오래 일하는 풍토가 조성돼야 한다. 의무적으로 퇴직연령을 높이면 기업들이 감당하기 힘들 수 있다.

 -돈이 많은 고령자도 일을 해야 하는 것인가.

 우재룡=일은 돈뿐 아니라 인간관계와 삶의 보람을 가져다준다. 노후 생활자금에 문제가 없는 고령자라면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봉사활동 등으로 일의 영역을 넓힐 수 있다. 굳이 연속해서 일할 필요도 없다. 여가 생활과 공부, 일과 봉사활동 등을 번갈아 가면서 할 수도 있다.

 프리드먼=돈에 개의치 않고 사회적 활동을 하면 평생 은퇴 없이 사는 셈이 된다. 그러면 돈보다 더 값진 건강과 행복이란 보상을 받게 된다.

특별취재팀 =김광기(팀장) 김동호·최선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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