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예술가의 초상 '폴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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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전기영화를 꽤 좋아하는 편이다. 음악가와 화가, 영화인 등 특정한 인물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들 생의 빛나는 순간을 스크린으로 마주하는 것은 언제나 특별하다.

그런데 대체 이 사람은 화가일까, 아니면 평범한 알콜중독자일까? 영화를 보면 쉽게 분간할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 영화 속 주인공은 혹자들로부터 대단한 찬사를 받는다. "위대한 예술가" 혹은 "천재"로서 말이다. 그런데 이 사람의 생활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기 충분하다. 작업할 때 만취한 상태일 때가 있고, 평소 조용하다가도 조금만 술을 마신 뒤엔 태도가 일변하기 때문이다. 친구들 앞에서 식탁을 엎는 일은 예사다. 영화 '폴락'은 이렇듯 빛과 그림자, 이중적인 측면을 지닌 화가의 삶에 카메라를 근접시킨다.

사실 영화는 논란적인 요소를 몇가지 구비하고 있다. 무엇보다 잭슨 폴락(1912-1956)이라는 인물의 작품세계가 한때 논란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 추상표현주의 화가로 분류되는 잭슨 폴락은 생전에 거센 찬반양론을 경험해야만 했다. 어떤 이는 그의 미술에 대해 "뛰어난 현대미술이자 무의식의 반영"이라는 평가를 내렸지만 반대쪽 의견을 지닌 사람은 "천박한 수준의 것"이라는 혹평을 마다하지 않았으므로. 배우 출신인 에드 해리스가 직접 잭슨 폴락을 연기하면서 감독까지 겸한 '폴락'은 무엇보다 이렇듯 상호모순적인 면을 간직한 화가의 삶을 가감없이 스크린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알콜중독자이자 무명화가인 잭슨 폴락은 여류화가 리 크레이즈너를 만난다. 리는 잭슨 폴락의 천재성을 금새 발견하고 그의 지원자가 되기에 이른다. 두사람은 동거생활을 시작하지만 생활이 그리 만만치는 않다. 잭슨 폴락은 그의 후원자들이 보는 앞에서 소변을 보고, 술에 취해 난동을 벌이는 등 여러 가지 사건을 벌이기 때문. 하지만 리 크레이즈너는 자신의 예술을 포기하면서까지 잭슨 폴락이 작품에 몰두할 것을 종용하고, 결국 그를 성공의 길로 이끈다. 하지만 다시금 잭슨 폴락은 술과 여자의 세계를 접하면서 슬럼프에 빠진다.

영화는 잭슨 폴락의 일대기를 몇단계로 구분해놓는다. 그가 무명시절을 거쳐 성공한 화가로 되기까지, 그리고 결국 내리막길을 걷는 과정 등으로 나눠놓은 것이다. 감독이자 주연인 에드 해리스는 영화에서 단순한 시각적 표현으로 영역구분을 시도한다. 영화 초반부가 다소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의 무채색 영상을 전면에 내세운다면, 영화가 진행될수록 차츰 색채는 온화해지고 밝아진다. 다시 말해서 영화에서 화가가 어두운 시절을 보낼 때 회색빛 톤으로, 그리고 그가 전원생활과 신혼을 즐길 때는 초록빛 톤을 강조하면서 화가의 내면을 표현하는 것. 기실 이 과정은 화가의 실제 작업과도 맞물려있다. 초기 잭슨 폴락의 작품들이 다소 거칠고 투박하면서 도회적인 감수성을 부각시켰다면, 잭슨 폴락이 붓을 이용하는 대신 물감을 캔버스에 뿌리는 기법을 시도하는 이른바 '액션 페인팅' 시대를 연 후기 작품에선 화사한 느낌의 추상화들로 변화한 거다.

영화 '폴락'은 예술가를 등장시킨 여느 전기영화와는 다소 구분되는 점이 있다. 다른 전기영화들이 예술가들의 고뇌와 영감의 '순간'에 집착했다면 '폴락'은 실존인물의 일상에 더욱 관심을 가지는 것. 즉 예술적인 혼의 카리스마를 내세우는 대신, 잭슨 폴락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가정적으로 결핍된 인물이었는지, 그리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 아내를 비롯한 주변인에게 의존했는지, 그리고 비참하고 쓸쓸한 최후를 맞이했는지를 담담하게 스케치하고 있다. 영화에서 잭슨 폴락은 나이 먹은 아내를 잠시 저버리고, 젊은 여성들과 만취한 상태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와중에 교통사고로 급사한다(이는 실존인물의 최후와도 일치하는 것이다).

영화 '폴락'은 어느 천재화가의 상승과 몰락의 순간을 아무런 덧칠없이, 사실적으로 화면에 옮겨내고 있다. 이점은 전기영화로서 '폴락'이 갖고 있는 약점일수도 있지만 인물에 대한 일방적인 판타지를 강조하는, 안이한 결말을 피해갔다는 점에서 칭찬할만하다. "올해 최고의 영화중 한편"이라는 어느 해외비평가의 평가는, 그리 비약된 것도 아니며 지나치게 과한 상찬은 아닌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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