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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례’ 전 세계가 주시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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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일러스트=박용석 기자]
빅터 차
미국 조지타운대 교수

성탄 휴가 기간 중에 투자 분야에서 근무하는 한 미국인 동료로부터 한국에 대해 묻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의 질문은 간단했다. 어떻게 한국이 국제사회의 환영을 받지 못하던 부패하고 불투명한 시스템에서 상당히 개방되고 투명한 비즈니스 환경의 모범으로 변모하게 됐는가 하는 내용이었다. 중국에서 사업하는 많은 미국인처럼 그는 부패로 인한 변덕과 일관성 없이 오락가락하는 규칙 적용에 실망하고, 중국이 언제쯤, 어떻게 이른바 ‘한국 사례’를 따르게 될 것인가를 알고 싶어 했다.

 ‘한국 사례’는 최근 들어 부쩍 더 자주 들리는 용어다. 국제 원조 전문가들은 어떻게 다른 나라들이 개발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바뀐 한국의 길을 따를 것인가를 궁금해한다. 아프리카의 전문가들은 자기 나라가 그렇게 갈망하는 올림픽·월드컵·월드엑스포 같은 글로벌 이벤트를 개최한 한국의 사례에 감탄한다. 중국이 이른바 소프트파워 확산 실패에 난처해하고 있는 동안 한국의 ‘강남스타일’은 전 세계 10억 명 이상의 이목을 끌고 있다.

 ‘한국 사례’는 여러 요인에 기인하겠지만 그중 두 가지 요소가 가장 두드러진다고 생각한다. 1987년의 민주화와 97년의 외환위기가 그것이다. 전자는 한국인이 일상적인 생각에선 이젠 거의 떠올리지 않는 요소다. 후자는 아이로니컬하게도 평균적인 한국인은 거의 잊어버리고 싶은 것이다. 97년 외환위기는 한국인의 경제와 가계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줬으며 이전까지 성장을 견인했던 경제체제의 결함을 보여줬다. 한국인은 당시 국제통화기금(IMF)이 제시한 고통스러운 개혁방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덕분에 경제체질을 개선해 미국 등이 5년 전 말려들어간 글로벌 재정 몰락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민주화는 지금과 같은 한국의 탄생에 매우 중요하다. 이는 대통령 직선제를 채택해서가 아니라 개방성과 준법, 투명성을 한국 사회의 목표로 삼게 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물론 88년 올림픽이나 중산층의 출현 같은 다른 요인도 있지만 민주화와 외환위기가 없었다면 지금 전 세계가 ‘한국 사례’를 입에 올리는 시대가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한국인은 미국인과 마찬가지로 일상 생활에서 민주주의를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상당수 한국인은 아마 이번에 독재자의 딸을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한 자국의 정치 시스템을 원망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또다시 새로운 사례를 하나 더 만들었다.

 동아시아의 어떤 나라도 여성을 자국의 최고위직으로 선출한 전례가 없다. 아시아 정치에선 스캔들이 하나의 규범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필리핀·한국 같은 민주주의 국가에선 최근 선거에서 당락을 좌우할 만한 부정은 없었다. 미국에서와 같은 투표소의 혼란도 없었다.

 한국인은 자신들의 후보를 그렇게 보지 않았겠지만, 전 세계는 의무감에서 마지못해 출마한 것 같아 보이는 조용한 신사를 주목했다. 이 후보는 전직 대통령에게 충성하며 더욱 공정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그의 정치적 비전을 따르려고 했다. 아울러 세계는 정치라는 추악한 세계에 들어갈 아무런 필요도 없었으나 97년 이 나라가 외환위기에 빠지자 정치 입문을 결심했던 한 여성도 주목했다. 이 여성 후보는 정치적으로 분열된 국가를 통합하겠다는 공약으로 이 나라의 가장 높은 자리로 올라서게 됐다.

 대선 후보의 성격을 이렇게 순진하게 묘사한다면 한국인들이 웃겠지만 인식은 종종 현실을 구현한다. 실제로 전 세계는 두 대선 후보가 정치 권력을 쥐고 휘두르는 것보다 국민을 위한 공직 봉사에 진실로 관심이 더 많아 보이는 것으로 인식했다.

 여기에 더해 다음달 대통령에 취임할 박근혜 당선인은 한국의 이전 대통령들과 달리 이미 청와대에 거주한 적이 있다. 정치에서는 권력에 굶주린 사람이 더 권력을 갈망한다. 이를 위해 다른 가치를 포기하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주는 권력에 취하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더욱 초점을 맞추는 대통령을 가지는 것은 신선한 일이다.

 박근혜 당선인은 이미 북한을 방문해 그 나라의 지도자를 만나본 사람 가운데 최초의 청와대 주인이 될 것이다. 이는 전임 대통령들처럼 평양에 꼭 가야겠다는 외곬의 생각에 매달려 고통스러워할 가능성이 별로 없을 것을 의미한다. 물론 박 당선인이 한국을 최근의 경제 불황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필요한 경제 관련 경험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설혹 대통령 당선인이 그런 경험이 있다고 해도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다.

 대화가 마지막에 이르자 내 친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한 한국의 경험은 중국이 앞으로 갈 길이 얼마나 먼지를 잘 보여준다. 일부 한국인은 대통령 선거 결과에 실망해 있겠지만 한국은 다시 한번 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에서 하나의 새로운 사례가 되고 있다.

빅터 차 미국 조지타운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