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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당선자 한겨레신문 이례적 방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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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노무현(盧武鉉) 대통령당선자가 특정 신문사를 방문한 것과 그 신문사의 보도 행태가 화제로 떠올랐다.

盧당선자는 지난 9일 오후 한겨레 신문사를 방문했고, 한겨레는 그의 방문 사실을 사진과 함께 1면 사이드 톱으로 보도했다. 이 기사의 제목은 "노 당선자 한겨레 방문… 북핵 등 의견교환"이었다.

대통령당선자가 특정 언론사를 방문하는 것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극히 이례적인 일이라 그 배경과 목적에 많은 사람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날 盧당선자는 서울국제포럼에 참석해 김경원.현홍주씨 등 보수적인 국제문제 전문가들과 오찬을 하면서 북핵, 한.미, 북.미 현안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盧당선자 측은 이날 낮 12시30분쯤 한겨레에 방문 의사를 알렸고, 오후 2시30분 신문사에 도착했다. 盧당선자는 한시간 가량 최학래 대표, 조영호 전무, 조상기 편집국장 등과 북핵문제, 남북관계, 한.미관계 등 현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으며, 편집국에 들러 기자들과 악수를 나누었다고 한겨레 신문은 보도했다.

이낙연 당선자 대변인은 "북핵문제 등 현안에 대한 원로.중견 언론인의 의견을 듣기 위해 찾은 것"이라고 공식적인 방문 목적을 밝혔다. 盧당선자 측근에서는 이번 방문을 정치적 배경이 없는 '특유의 노무현 행동 스타일'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盧당선자를 줄곧 지지해온 한겨레에 대한 애정의 표시라고 해석했다.

반면 일부 인수위 관계자와 특보 등은 "그 전날 조선일보가 청와대 비서실장과 정무수석 내정 기사를 단독 보도한 데 따른 지지자들의 비난 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특종에 盧당선자와 인수위는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盧당선자 인터넷 홈페이지와 오마이뉴스 게시판 등에도 "뒷거래를 하느냐"는 등 비판 여론이 빗발쳤다. 또 盧후보 지지 성향을 보였던 신문사의 한 간부는 제작회의에서 노무현 당선자를 직접 비난하는 등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으로 알려졌다.

1999년에도 특정 신문이 5.24 개각보도를 적중하자, 우호적이던 신문이 '조세형 후보의 광명 보궐선거 50억 사용''옷로비 사건'등을 터뜨려 DJ 정권이 어려움에 처하게 된 점을 유념해야 한다는 측근의 조언에 따라 盧당선자가 한겨레 신문을 방문하게 됐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한겨레 내부에서도 盧당선자의 방문과 보도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한쪽에서는 "대통령당선자가 찾아온 것은 전례가 없는 큰 사건으로 의미있는 일"이라며 방문과 기사 게재를 옹호하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이미 한겨레가 대선 때 노무현 후보에게 유리한 보도를 해 공정성에 문제가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를 확인해 주는 듯한 사건"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진보적인 한 언론학자는 "대통령당선자가 특정 신문사를 방문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다른 방식으로 한겨레에 애정을 표시할 수 있고, 또 盧당선자의 방문을 한겨레 경영진이 적극 만류했어야 했다"고 비판했다.

한 시민단체 간부는 "盧후보를 지지했다고 특권을 바라는 것은 문제"라며 "이를 盧당선자가 받아들이면 자신의 원칙과 철학을 저버리는 것으로 신문사나 盧당선자 측 어디에도 득이 될 수 없음을 유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화여대 이재경 교수는 "盧당선자가 특정 신문사에 갈 수도 있고 안 갈 수도 있다고 본다"며 "언론이 제 역할을 다하려면 스스로를 낮추고 정치인.장관.최고경영자(CEO)들이 신임 인사차 방문하는 것을 막고 신문 지면에서도 '본사 방문'같은 홍보란을 없애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선진외국에서 대통령이나 수상 당선자가 특정 언론사를 방문한 사례는 없다.

다만 미국의 경우 워싱턴 포스트의 사주였던 고 캐서린 그레이엄 여사가 레이건.클린턴.부시 등 당시 대통령당선자들을 워싱턴 자택으로 초대해 파티를 열어준 일이 있다.

김택환 미디어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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