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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대 농림 장관 정낙훈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새벽 5시. 칠순 노인이 비를 들고 자기 집 앞길을 쓸고, 이웃까지도 말끔히 치워준다. 「아스팔트」아닌 앞길에 패인 곳이 눈에 띄면 비오는 날 흙탕물이 튈세라 돌과 흙을 주워다 차곡차곡 메운다. 문패조차도 아들의 이름으로 달고 조용히 살아가는 이 노인이 장관과 민의원을 지낸 정낙훈옹인 줄 모르는 사람이 많다.
자칭 「촌뜨기」 정씨가 55년 8월 31일 충북 지사에서 12대 농림 장관으로 벼락발령을 받았을 때 환율이 250대에서 500대로 껑충 뛰자 비료값은 부대당 4백환에서 1천환이 되어 농민들이 아우성을 쳤다. 그래서 추곡 매입가를 석유 1만5천환으로 내세웠다. 재무부 장관은 1만 2천환을 고집, 싸움으로 번졌다. 농림부 안이 패퇴하자 농민 속에서 관료로 성장해온 정씨는 사표를 던져 78일만에 감투를 팽개쳤다. 당시 모 신문 사설은 『책임 있는 장관으로서 떳떳한 일』이라고 찬양했다. 그후 4대 민의원으로 당선, 4·19후 정계에서 아주 물러서 세인의 망각 속으로 사라졌었다.
마상에 깨끗이 벗어 넘긴 흰머리, 노인 치곤 아직도 정정한 정씨는 『글세, 무서운 그 양반(이 박사) 앞에서 이 촌뜨기가 눈치도 없이 주장을 뻗대었더니 옆에 앉았던 모 장관이 양복 뒷자락을 잡아당기잖아』하며 한복 저고리뒷자락을 한 손으로 당기는 시늉을 하며 당시를 회상한다.
『근래에는 찾아오는 사람도 별로 없지. 한학에 취미가 있어 글 좀 쓰다보면 하루가 가고 그래』충청도 억양으로 가만가만 얘기한다.
선반 위에 쌓아놓은 원고가 합치면 가슴높이는 될만했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순서도 없이 썼는데 7천장만 더 써 2만장을 채우겠다고 말한다. 내용은 「전고적 단어풀이」인데 「흥청」-득의한 사람의 모양으로 연산주가 기녀의 총명을 운평이라 했다가 흥청이라 고친데서 나온 말이라는 등.
아직도 안경을 쓸 필요가 없다는 그는 18세에 공주농업학교를 졸업하고 군의 지사로 출발, 각지의 군수, 도의 국장을 거쳐 46년간이란 길고 긴 이도를 달리면서 청렴강직의 평을 남긴 씨에게는 두 살 위인 부인 박 여사(74)와 4남1녀가 건재하며 19명의 손자가 있다.
이대 교수인 막내아들 병희씨(돈암동 산 11의 24) 집에서 2평 남짓한 앉은 상하나 뿐인 서재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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