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위안부 할머니들 고국 품으로 모셔온 김원동씨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경기도 용인의 한 양로원. 김원동(오른쪽)씨가 이귀녀 할머니를 찾았다.

고 정학수·정수재·이금순·백넙데기 할머니, 하상숙(84)·이귀녀(85) 할머니…. 일제강점기, 10대였던 할머니들은 일본군 위안부로 중국에 끌려갔다가 해방 후에도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중국의 한 시골 마을에서 한국어도 잊어버린 채 살아왔다.

 그런 할머니들에게 ‘고국’을 되찾아 준 이가 있다. 20년 가깝게 위안부 피해 할머니 귀국 운동을 펼치고 있는 김원동(67)씨다. “더 많은 할머니들을 모시지 못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아픔이 많은 분들인데….”

 김씨는 지금까지 위안부 할머니 6명을 한국으로 데려왔다. 그는 “나라를 잃고 떠도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사연을 차마 외면하기 힘들어 시작한 일”이라고 말했다.

 섬유사업을 하던 김씨는 1993년 사업차 중국 난징(南京)에 갔다. 그곳에서 고 정학수 할머니의 비극적 사연을 들었다. 할머니는 19세이던 1944년 위안부로 중국에 끌려왔다가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중국인과 결혼도 했지만 끝내 버림받았다.

 김씨는 “귀국 비용만 마련하면 할머니를 한국으로 모셔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무작정 할머니가 타고갈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그러나 곧 장벽에 부닥쳤다. 한·중 수교 전이던 당시엔 법적 독립유공자의 후손을 제외하곤 어떤 주중 동포도 귀국이 불가능했다. 김씨는 정부에 탄원서를 내고 일주일에 한 번꼴로 중국을 오가며 할머니 귀국 운동을 펼쳤다.

 결국 95년 법무부로부터 ‘한국인임을 증명할 수 있고 위안부로 끌려간 사실을 증언할 사람이 있는 경우에 한해 영주귀국을 허락한다’는 법령 제정을 이끌어냈다. 이듬해 정 할머니는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김씨가 3년간 뛰어다닌 결과였다.

 김씨의 ‘위안부 피해 할머니 귀국 운동’의 첫걸음이었다. 97년에는 중국의 시골을 헤맨 끝에 정수재·이금순 할머니를 찾았고, 2003년에는 북한 국적의 하상숙, 백넙데기 할머니를 한국에 데려왔다. 김씨는 귀국한 할머니들에게 빌라 2채와 생활비를 제공하며 돌봤다.

 2006년 김씨의 사업이 위기에 빠졌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2010년 12월, 중국의 이귀녀 할머니와 연락이 닿았다. 할머니는 “죽어도 한국에서 죽고싶다”며 울먹였다. 김씨는 주변의 도움을 받아 지난 3월 할머니를 한국으로 모셔왔다. 할머니는 경기도 용인의 한 양로원에서 지내고 있다.

 그 사이 김씨도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현재 서울성결교회 장로로, 해외 선교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나도 나이가 들었지만, 모진 삶을 산 위안부 할머니들의 여생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송지영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