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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영의 신중국 경제 대장정] 12·끝 에필로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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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형.

연재를 마치려니 시작할 때보다 더 부끄럽습니다. 1963년 9월이라고 기억됩니다.

당시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유고슬라비아는 과연 사회주의 국가인가'라는 도전적인 제목의 공개 서한을 발표했습니다.

질문형의 제목이 벌써 집필 의도를 암시하고 있습니다만, 무려 50여쪽 장문의 문건이 겨냥하는 바는 한마디로 유고에 범람하는 시장 관계가 사회주의 체제를 파괴한다는 비난이었습니다.

그 속에는 물론 미국 제국주의에 강력히 대항하지 않고 수정주의 노선을 취하는 소련 공산당에 대한 강력한 분노가 스며 있습니다.

이를 놓고 진보 학계에 일대 논쟁이 일었습니다. 미국의 폴 스위지와 프랑스의 샤를 베틀레임이 그 주역인데, 둘 다 둘째 가라면 통곡할 일류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입니다.

스위지는 '시장 관계'의 범람이 자본주의로의 복귀를 재촉한다고 진단한 반면, 베틀레임은 공산당의 '정치적 의지'만 강력하다면 시장 요인은 부차적인 문제라고 반박했습니다.

유고 연방이 무너진 오늘 역사는 스위지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당시 티토를 비난한 중국 지도자들도 세상을 떠나지 않았으면 어서 그 기억을 지우고 싶을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은 베틀레임의 강의를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시장은 한낱 수단일 뿐이며, 혹시 탈선의 기미가 보이면 당의 개입으로 얼마든지 막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여기 오해가 있습니다.

시장은 수급 균형을 유도하는 따위의 가치 중립적 기능을 넘어 이윤 극대화 투쟁의 최전선 이데올로기입니다.

이윤은 자본을 부르고, 자본은 자본주의를 부릅니다. 이기심의 용광로인 시장을 당이 정치적 의지로-이타심 강요로(!)-누르려는 鄧의 모험은 엄청난 도박입니다. 레닌도, 티토도, 아옌데도, 마오쩌둥(毛澤東)도,고르바초프도 모두 이 내기에 졌습니다.

행여 중국이 이긴다면 실로 인류 초유의 성공 사례가 될 것입니다. 학문적인 관심에서도 저는 중국의 승리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글쎄 이런 말씀을 드려도 무사할지(□) 모르겠으나 공산당에 대한 인민의 신뢰는 대단한 것 같았습니다. 현지의 우리 기업인들조차 뭔가 막히면 당 간부들을 찾아간다니 말입니다.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중국에도 노점상이 있고 철거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묵인 수준을 넘어 통행과 미관을 해칠 경우 당국은 언제부터 단속하겠다고 예고한답니다. 마침내 그날이 오면 썰물 뒤의 백사장처럼 거리가 말끔해진다는 것입니다. 대책위도 없고 시민단체도 없으며, 행여나 대들었다가는 참말로 '험한 꼴'을 보기 때문입니다.

외신에 인권 탄압으로 보도되는 적잖은 사건들이 중국인의 눈에는 정부가 마땅히 할 일을 한 것입니다. 독선이나 억지가 아닌 바에 '한다면 틀림없이 하는' 정부를 어떻게 믿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시장의 힘이 커질수록 정부의 개입은 점점 약해질 수밖에 없는 현실에 있습니다. 수표와 탱크의 격돌로 사회가 불안하면 개혁.개방을 일시 유보는 하겠지만, 그래도 궁극적인 승자는 수표일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시장은 손오공의 여의봉(如意棒)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시장이 벼락부자를 만들어줄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소득이 노력에 비례하는 개혁.개방의 초기 단계에서는 모두가 '시장 만세'를 불렀지만, 미구에 소득이 자본에 비례하게 되면 그 여의봉에 의심을 품겠지요.

중국 사회주의는 애초에 결핍의 경제였습니다. 그 결핍 속에서도 도시의 직장인은 평균 3만위안을-5년치 월급을-모아놓고 있었다니 저들의 인색과 축재에는 그저 놀랄 따름입니다. 사실은 살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는데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물건이 남아도는 경제에서는 돈이 문제입니다. 개혁.개방 이후 3천5백억달러의 외자가 들어오고, 7천7백억달러의 국내 저축이 뒤따랐는데 이것이 여의봉 노릇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는 소위 케인스 경제에 들어서면, 오늘의 서구 경제처럼 과잉 생산의 보복으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에서 사회주의는 가고 시장만 남을 것입니다.

예전에 읽은 프랑스 르몽드의 기사 하나를 번안하겠습니다. 70년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이 취임 직후 민정 시찰에 나섰는데, 교차로에서 운전사가 물었습니다.

"각하, 어느 쪽으로 가시겠습니까?"

"전임 나세르 대통령은 어떻게 하셨나?"

"좌회전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깜박이 신호는 왼쪽으로 보내고 차는 오른쪽으로 돌리게."

중국이 사회주의로 남느냐 자본주의로 가느냐는 저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배부르고 등 따시면 됐지 인민에게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가 무슨 문제겠습니까□ 그래서 누군가가 '벌거벗은 임금님'을 외칠 때까지는 사회주의로 신호를 보내면서 자본주의로 도는 혼란이 계속될 듯합니다.

베이징 근교 저우커우뎬에는 직립 보행의 시조(homo erectus)인 베이징원인의 유적(北京猿人遺址)이 보존돼 있습니다.

커다란 드럼통을 포개놓은 듯한 30여m 높이의 원통 동굴에 기막힌 도피구를 갖춘 서식처는 30만년 전의 인류가 행한 참으로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현장을 뜯어볼수록 그 깊은 궁리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그런데 유적 입구의 전시실에는 청(淸)대의 미라(mirra) 한 쌍이 유리 관(棺)에 누워 있었습니다. 관리로 보이는 60대 남자 곁에 누운 30대 여자의 두개골은 한쪽이 크게 으스러져 있었습니다.

저승길마저 호사하려는 강제 동반의 야욕과, 그 반항의 흔적일 듯합니다. 그 탁월한 선택의 유산이 고작 이렇게 무모한 폭력과 만행이냐는 반문 앞에 자본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다툼이 한낱 일장춘몽으로 보입니다.

청두(成都)에서 무후사를 나와 두보초당(杜甫草堂)을 찾아갔을 때도 비슷한 기분이었습니다. 한 치의 땅을-그것을 모은 것이 천하 아니겠습니까-놓고 다투던 공명의 차디찬 권력의 세계가 자연에 묻혀 인간사의 환난을 우수와 연민으로 읊조린 두보의 시 세계에 비하면 그야말로 하잘것없는 집착 아니냐는 저의 허탈한 '망념'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념보다 제도보다 질긴 민족이 자꾸 생각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충칭(重慶)과 상하이(上海)에서 우리는 임시정부 옛터를 찾아갔습니다.

전시된 사진 한 장, 자료 하나에 독립 지사들의 고난과 신산이 배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상하이 루쉰(魯迅)공원-예전의 훙커우 공원-한쪽에 윤봉길 의사의 의거 자리가 매정(梅亭)이란 팻말로 남아 있었습니다.

장부가 집을 떠나면 살아서 돌아가지 않는다(丈夫出家生不還)는 장한 결의로 폭탄을 던지고 장렬하게 산화한 것이 불과 69년 전입니다.

그렇게 싸우며 찾은 나라인데 오늘 이 꼴이 뭡니까?

그리고 참 중국에 다녀온 높은 양반들이 얼마나 많고, 중국에 진출한 기업들이 또 얼마나 많은데 그 투쟁의 자취와 역사들을 후손이 보기에 '덜 민망하게' 보존할 수는 없을까요?

일정을 마치고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왔을 때 저희는 완전히 녹초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인민일보 관계자가 '물정 모르고' 안내한 평양해당화랭면 찬청(餐廳)에서 '조국의 소불고기'를 먹었는데, 분홍색 치마저고리 차림의 낭자가 '자진해서' 따라준 맥주 한 잔이 그렇게 시원할 수 없었습니다.

그게 어찌 맥주만의 맛이겠습니까? 이 용감한 세계화 시대에 민족 따위를 들먹이는 저는 구제받기 힘든 녀석일 것이 확실합니다.

K형. 귀국 비행기에서 줄곧 시달린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무려 3만리의 대장정에서 대체 무엇을 보고 무엇을 얻었느냐는 의문이었습니다.

엉뚱하게도 "중국을 보기 전에 한국을 먼저 보라"는 경고가 가장 먼저 떠올랐습니다. 세월이 하수상하니 굳게 버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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