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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검은돈은 밝은 곳 싫어하는데 … 372조원, 자수해서 광명 찾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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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지난달 21일 수원역에서 현금 5000만원이 든 돈가방이 발견됐다. 물품보관함에 들어 있던 이 돈가방의 주인은 한 달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지난해 4월엔 전북 김제의 밭에서 110억원이 발견됐다. 유명한 ‘마늘밭’ 사건이다. 이 돈의 출처는 불법도박 사이트 운영 수익으로 밝혀졌다.

 지하경제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박근혜 당선인이 지하경제 양성화를 공약하면서다. 박 당선인 측은 지하경제의 6%만 양성화해도 연간 1조6000억원의 세수를 늘릴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 고소득 자영업자와 대기업 탈루소득에 과세를 강화하면 연간 1조4000억원을 추가 확보할 수 있다는 계산도 한다. 둘을 합하면 5년간 재원 확충 규모가 15조원에 이른다. ‘블랙머니의 화이트닝(검은돈 양성화)’에 가장 적극적인 인사는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다. 그는 23일 “부자증세 해봐야 몇 푼 안 된다”며 “상속세 포탈, 기업 비자금 등 지하경제 양성화를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 과거 정권의 금융실명제나 금융소득종합과세 등 굵직한 경제 개혁은 모두 지하경제를 겨냥한 것이다. 그러나 효과에 대해선 여전히 논란이 분분하다. 우선 지하경제의 규모부터 아리송하다. 새누리당은 지하경제 규모를 약 372조원으로 본다. 정부가 짠 내년 예산안(342조5000억원)보다 많다. 지하경제 전문가인 프리드리히 슈나이더 오스트리아 리츠대 교수는 한국에 인색한 평가를 하고 있다. 1999~2007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지하경제 비율이 평균 26.8%에 달한다고 봤다. 이는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스페인·포르투갈·그리스와 비슷한 수준이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미국·스위스·오스트리아 등은 지하경제 비중이 GDP의 10%에도 못 미친다.

 조세연구원의 분석은 다르다. 슈나이더 교수는 국제 비교가 가능한 수치만 이용하다 보니 한국의 특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는 논리다. 조세연구원 분석은 2008년을 기준으로 GDP의 17%(160조~170조원) 정도다. 지하경제의 기준을 소득세 탈루로 좁게 해석하면 GDP의 2~3%(22조~29원)에 불과하다는 분석도 있다. 안종석 조세연구원 연구위원은 “금융실명제 실시와 신용카드 결제액 소득공제 등으로 1990년대 이후 지하경제 규모가 축소되는 추세”라고 진단한다. 새누리당이 추정한 지하경제 규모가 상대적으로 큰 것은 과거 GDP를 기준으로 한 지하경제 비율을 지난해 GDP를 기준으로 단순 환산한 측면도 있다.

 정부의 공식적인 지하경제 규모 통계는 아직 없다. 류성걸 새누리당 의원은 지난 국감에서 “지하경제 양성화를 통한 세수 확보의 첫걸음은 규모 파악”이라고 강조했다.

 지하경제와의 전쟁은 한국만의 일은 아니다. ‘파켈라키(작은 봉투)’로 대표되는 그리스의 촌지 문화가 대표적이다. 2009년 한 해에만 그리스 정부가 거두지 못한 세금이 330억 유로라는 분석도 있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지하경제와 탈세를 양성화하려는 정부의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탈리아 위기가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내놓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지하경제 규모는 GDP의 21.7%(2010년 기준)로 추정된다.

 그러나 어느 나라에서도 이거다 싶은 방안은 찾지 못했다. 세금 많이 내기 싫은 게 인지상정이듯, 돈도 태생적으로 밝은 곳을 싫어한다. 웬만한 자극에도 검은돈은 꿈쩍 않는다. 그리스는 6000여 개 탈세기업 명단을 발표했으나 별반 반응이 없다. 방글라데시는 지난 6월 검은돈 합법화를 추진했다. 검은돈 소유자가 현재 시점을 기준으로 세금을 내고, 세금의 10%만 벌금을 내면 면죄부를 주는 제도인데 사회적 논란만 일으켰을 뿐이다.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든 건 ‘지하경제의 국제화’다. 국세청의 역외 탈세 조사 실적이 2008년 1503억원에서 지난해 9637억원으로 6배 늘어났다. 검은돈은 안을 조이면 밖으로 튀어나가는 속성이 있다는 얘기다.

 박 당선인 측이 만지작거리는 카드는 금융정보분석원(FIU)의 정보를 국세청이 지금보다 더 쉽게 활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FIU는 1000만원 이상 금융 거래 내역에 대한 정보를 보유하고 있다. 이미 이한구 원내대표 주도로 관련 법 개정안이 국회에 올라가 있다. 미국·영국·호주 등은 국세청이 FIU 정보망에 직접 접근할 수 있다. 김재진 한국조세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실물거래 중심의 과세인프라 체계는 갈수록 진화하는 신종·첨단 탈세를 막는 데 한계가 있다”며 “금융거래 중심의 과세 인프라 구축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반론도 적지 않다. 금융실명제는 FIU 정보 이용보다 훨씬 강력한 정책이었지만, 기대만큼 효과를 못 봤다는 평가다. 국세청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차명 재산 규모를 3만2000건(4조7000억원) 정도로 보고 있다.

 자칫하면 국세청 배 불리기가 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현진권 한국경제연구원 사회통합센터 소장은 “세계 최정상급인 한국의 과세 정보 전산화 수준 등을 감안할 때 지하경제 양성화 정책을 펴봐야 비용 대비 효과가 크지 않다”며 “자칫하면 세금 걷는 비용만 늘리고 공무원 수만 증가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하경제 양성화를 하려면 소규모 자영업자에 적용되는 간이과세 제도 등을 축소하는 인기 없는 정책부터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최근 “지하경제 비중을 낮춰 누구나 정당하게 세금 내게 하는 것이 최우선이지만 세율을 올리는 식은 가장 하책”이라고 지적했다. 오윤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시민 탈세 감시단 활성화, 포상금 지급 인상 등 사회공동체와 협력을 강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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