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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미완성 공연장 '정미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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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멘트가 그대로 드러난 기둥, 뻥 뚫린 천장으로 보이는 뒤엉킨 배관들, 깨뜨리다 만 타일벽….

철거 직전의 건물 내부를 묘사한다면 이럴 듯하다. 휑뎅그렁한 공간에 들어서면 괴기스러움마저 느껴질 것이다. 그런데 이런 버려진 공간이 공연 무대로 탈바꿈했다. 지난 9일부터 연극 '19그리고80'이 공연되는 서울 대학로 객석빌딩 1층이 바로 그곳이다.

연극인 윤석화씨는 2년 전 제대로 된 공연장을 만들자며 사무실로 쓰던 1층 전체를 허물었다. 그러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재정 압박이 더해지면서 이 공간은 방치됐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윤씨의 지인들은 "철거된 모습 그대로 공연장으로 활용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해왔다.

폐허나 다름없는 공간을 공연장으로 쓴다고? 지난해 가을 무모하고 위험한 시도는 시작됐다. 공연장 이름도 붙였다. '정미소'. 쌀을 찧어 내놓는 방앗간처럼 아름다움을 생산하는 장소란 뜻이다.

지난해 10월 가수 이문세의 쇼케이스 '시음회(試音會)'를 시작으로 11월 윤석화의 드라마콘서트 '꽃밭에서'가 성황리에 공연을 마쳤다. 작품 자체에 쏟아진 찬사도 찬사지만 공연장에 대한 평가도 괜찮았다. 관객들은 "신선하다" "실험적이다"라며 이 미완성 공간에 대해 큰 만족감을 표했다.

'19그리고80'이 무대에 오르는 요즘 이곳을 들른 관객들은 두번 놀란다. 박정자씨의 혼을 담은 연기와 젊은 청년의 가벼운 듯 고뇌하는 연기가 그렇고, 철근 콘크리트와 배관을 활용한 아름답고 자유로운 공연장 분위기가 또 그렇다.

윤석화씨는 2년 안에 이 공간을 번듯한 공연장으로 신축할 계획이다. 좌석.공연설비 등 배우들이 공연하기 좋고, 관객들이 좀더 편하게 앉아서 관람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정미소'는 헐다만 공간이 얼마나 예술적인 공간으로 변모할 수 있는가를 보여줬다. 배우에게 열악한 환경이라도, 관객이 좀 불편하더라도, 지금 그대로의 모습을 지켜달라면 너무 이기적인 부탁일까.

글.사진=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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