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제국을 움직이는 거인들 [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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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스탠퍼드 비즈니스 스클에서 앤디 그로브 회장은 디지털시대에서의 생존을 강의했다. 한 학생은 마치 신의 계시를 받은 것 같았다고 말했다.

중요한 발명품을 잇따라 쏟아낸 인텔의 ‘기이한 첫 3년’, 그만큼 개발자들의 스트레스도 심했다. 그로브도 두겹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생산 책임자로서 제품화가 결정된 원안들을 제때에 만족할 만한 물건으로 만들어 내야 하는 압박감과, 그러러면 부하들을 몰아붙여야 하는데 그들을 짜내는 데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텔의 대부분 엔지니어들은 자정 전에 집에 들어가 가족을 볼 수 있다면 그날은 행운의 날이었다.

이러한 압박감은 종종 회의에서 불미스러운 충돌로 불거져 나왔다. 마케팅 책임자는 경험이 많고 정력적인 보브 그레이엄이었는데 그는 말이 통하지 않는 그로브에게 불만이 많았다. 그로브는 그로브대로 생산부서의 어려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레이엄이 불만이었다. 상황을 더 악화시킨 것은 그로브의 험한 입이었다. 회의에서 그가 쏟아내는 욕들을 보면 그가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했는데 그레이엄을 분노로 벌겋게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두사람은 서로 말도 안하게 됐다.

마침내 노이스와 무어는 두사람 중 한사람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까지 왔다. 결정은 쉽지 않았지만 결론은 분명했다. 누가 더 인텔의 성공에 필요한가. 앞으로 닥쳐올 격랑을 헤쳐 나가기 위해 과감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두사람은 그로브를 선택했다. 그는 두려움을 모르는 파이터였다. 이날 이후 분명해진 것은 위에 노이스와 무어가 있었지만 회사를 이끌어 나가는 데 매일매일의 결정권은 그로브의 손에 들어왔다는 점이다.

노이스와 무어의 예상처럼 1970년대 이후 인텔은 빙산이 둥둥 떠다니는 위험한 바다를 항해하는 배와 같았다. 하나의 빙산이 지나가면 또 다른 빙산이 다가왔다. 메모리칩의 수요 감소, 해외 공장 스캔들, 일본 반도체회사의 덤핑공세 등.1981년 불경기가 닥쳐왔을 때 그로브가 내린 처방은 대량해고 대신 일을 125% 더하기였다. 무보수로 매일 2시간씩 일을 더하자는 것이었다. 일부 엔지니어들이 ‘착취공장’이라고 비난했지만 그로브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해야 한다.”
일본 반도체회사의 저가 공세는 인텔을 뿌리째 뒤흔들었다. 1970년대 중반 일본에서 반도체를 만든다고 하자 실리콘밸리의 엔지니어들은 모두 웃었다. 심지어 어색한 영어와 이해할 수 없는 미소를 띠고 트레이드 쇼나 컨퍼런스를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는 그들을 보고 ‘일본놈들’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작은 카메라로 진열된 제품들을 열심히 찍어댔다. 그리고 그 사진을 일본으로 가져가 철저히 연구했다.그렇게 눈동냥으로 배워 일으킨 일본의 컴퓨터산업이 1970년대 말이 되자 생산성에서 미국을 앞지르는 일이 일어났다. 집중투자, 일본 근로자의 성실성 등이 승패를 가른 요인으로 거론됐으나 실리콘밸리 반도체업체들에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충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베끼기를 잘하는 것으로 업신여김을 당하던 후지쯔가 1979년 처음으로 독자적으로 개발한 64KDRAM이라는 ‘폭탄’을 미국시장에 떨어뜨렸다. 이어 두번째 공습은 히타치가 감행했다. 당시 차세대 칩이라고 여겨지던 256K를 미국보다 앞서 개발한 것이다. 이제 미국은 메모리 분야에서 생산성, 가격, 기술 모두 일본에 추월당하는 신세가 됐다.

▷사이버제국을 움직이는 거인들

1. 선 마이크로시스템을 만든 동갑내기 4명의 이야기
2. 미래에 대한 두려움 없는 ‘스탠퍼드의 아이들’
3. '화살 하나에 모든 승부를 건다’
4. 반도체혁명 주도 인텔의 앤디 그로브
5. 8인의 실리콘밸리 창시자들
6. 인텔의 운명을 결정한 ‘기이한 첫 3년’
7. 잇따른 빙산 피할 수 있었던 인텔의 행로

이종천 뉴스위크한국판 기자
자료제공:월간중앙(http://monthly.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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