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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집이나 만들던헌 집 폐목재도다 쓰기 나름이죠”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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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호 14면

1 피에트 헤인 에크(뒷줄 맨왼쪽)가 한국 디자이너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서울 종로구 통인동 154-10번지 ‘이상의 집’. 재단법인 아름지기가 운영하는 이곳은 천재 문학가 이상(본명 김해경, 1910~1937)이 큰아버지 슬하에서 20년 가까이 살았던 곳이다. 이상은 1933년 종로1가에 ‘제비’라는 이름의 다방을 개업했는데, 이와 관련해 ‘이상의 집’은 내년 4월 17일 이상의 기일(忌日)까지 ‘제비 다방’이라는 명칭으로 ‘임시 영업’ 중이다. 이상과 관련된 책들을 보면서 차도 마시고 이곳을 찾는 예술인들과 소통할 수 있는 독특한 공간이다.

한국 온 네덜란드 가구 디자이너, 피에트 헤인 에크

12일 오후 3시 귀한 손님들이 이곳을 방문했다. 네덜란드의 가구 디자이너 피에트 헤인 에크(Piet Hein Eek·45)와 한국의 젊은 가구 디자이너 하지훈(40), 오세환(41), 장민승(33)씨 등이다. 새로운 프로젝트 구상을 위해 한국을 처음 방문한 에크는 폐목재를 독특한 미감을 지닌 가구로 변신시키는 데 특출 난 재능을 가진 작가이자 제작사 대표다. 유명한 에인트호번 디자인아카데미에서 가구와 산업디자인을 전공했다. 1996년 에인트호번 근처 겔드롭에 공방과 사무실은 물론 쇼룸까지 갖춰진 공장을 설립, 판매와 유통 업무까지 맡고 있다. 버려진 목재를 활용해 각각 다른 나뭇조각의 색깔을 멋스럽게 조합해 만든 가구 스크랩 우드(scrap wood) 시리즈로 명성을 얻었다.

2,폐목재를 이용해 만든 피에트 헤인 에크의 가구 ‘스크랩(scrap)’ 시리즈.ⓒoh chul hun

이날 자리에서 서로 다른 문화적 환경을 가진 가구 디자이너들은 ‘좋은 디자인이란 과연 무엇인지’ 묻고 답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4대의 아이패드는 이들의 설명과 이해를 도왔다. 원래 조각을 전공했다는 장민승 작가는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플라스틱 조각으로 만든 접이식 경대를 보여주었다. “재료를 보면서 어릴 적 외할머니의 목가구 경대가 떠올랐다”는 그는 “10년 전만 해도 디자이너는 디자인에 그쳤을 뿐 직접 만드는 경우는 드물었는데, 디자인과 제작을 함께하면서 이것도 조각 작업의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에크는 이에 대해 “디자이너는 ‘스페셜리스트’가 아니라 ‘제너럴리스트’가 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단순히 디자인만 신경 써서는 부족하며 재료 구입부터 제작·유통·판매에 이르는 전 과정에 개입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어린이 놀이터에 있는 정글짐을 세모꼴로 만들고 손으로 무두질한 가죽으로 조명기구를 만든 오세환 작가와 이케아 캐비닛에 주석 장식을 붙이거나 누에고치가 매달려 있는 듯한 조명기구를 선보인 하지훈 작가는 “나의 관심사를 어떻게 이 시대에 맞게 적용할 것인지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3,4,폐목재를 이용해 만든 피에트 헤인 에크의 가구 ‘스크랩(scrap)’ 시리즈.ⓒoh chul hun

“재료를 보면 뭘 만들어야 할지 떠올라”
에크는 “뭔가 창의적인 것이 나오기 위해서는 창의적인 작품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운을 뗐다.
“저는 재료(material)에서 영감을 받습니다. 어떤 재료를 보면 이것으로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버리는 폐목재를 활용해 의자나 탁자를 만듭니다. 원래 네덜란드에는 헌 집을 부술 때 나오는 폐자재를 활용하는 전통이 있었죠. 사실 그런 자재는 토끼집이나 만들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만의 디자인적 관점을 부각해 계속 만들다 보니 많은 사람이 좋아해 주었고, 그 결과 판매도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과 사는 것은 차이가 있는데 중요한 것은 시장에서 계속 존재해야 한다는 점이죠.”

그는 “다른 사람의 주문대로 만들면 목수, 내가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어야 디자이너”라고 일갈하며 “나는 제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을 판다”고 덧붙였다.
그가 특히 강조한 것은 재료 활용의 극대화. “사람들이 버리는 게 너무 많다”며 “좋은 디자이너는 최소한의 낭비로 최대한의 효과를 끌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철판으로 만든 책장의 이름은 ‘99.12%’인데, 이는 재료의 0.88%만 버렸다는 의미다. 구멍을 뚫는 것 같은 아주 미세한 부분만 버렸다고 했다.
그는 앞으로 새로운 문화의 시대가 열릴 것으로 예상했다. 번영과 문화는 반비례한다는 독특한 논리였다.

“1990년대부터 2010년까지는 경제성장기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부자가 되면서 자연 소비 위주의 생활이 성행하게 됐습니다. 문화적으로는 오히려 발전이 더뎠죠. 2010년 이후 전 세계가 경제적으로 어려움 겪고 있는데 이것이 오히려 문화적 측면에서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이 부족해지면 생각은 많아질 것이거든요.”

한국에 와서 8~9일 동안 함양 아름지기 한옥 등 곳곳을 다녀본 에크는 “한국은 산업화가 빠른 곳이라 그런지 거대한 뭔가가 생산되고 있다는 느낌이 있었다”며 “가지런한 조화가 인상적인 도쿄보다 전통과 현대성이 충돌하는 듯한 서울의 역동성이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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