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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영의 신중국 경제 대장정] 6. 흑묘백묘 논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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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륙 직전에 기내 방송을 통해 장시(江西)성 난창(南昌)은 '혁명과 전통의 도시' 라고 소개했다.

그래서 그랬던지 공항에서 우리를 영접한 성 정부 관계자는 무조건 8.1봉기기념관으로 직행했다.

거기 저우언라이(周恩來).주더(朱德).류보청(劉伯承)을 비롯해 뒷날 중국의 10대 원수 가운데 6명이 참여했다는 1928년 8월 1일의 남창봉기 실록들이 꼼꼼히 보존돼 있었다. 혁명 지휘부의 청사로 쓰인 기념관은 당시 일급 호텔이었다.

최초로 '홍색 정권' 이 세워진 징강산(井岡山)과 루이진(瑞金) 소비에트가 어미지향(魚米之鄕)의 이 도시에서 멀지 않았다.

그 전에 정말 '큰일' 이 벌어졌었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8.1대교 입구 양쪽에 거대한 흑묘백묘 석상이 서 있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좋은 고양이" (黑猫白猫 住老鼠 就是好猫)라는 덩샤오핑(鄧小平)의 등록 상표 말이다.

문혁 당시 이곳에 유배된 鄧의 인연을 생각해 97년 난창시와 시민들의 발의로 세웠다는데, 흑묘백묘 조각으로는 전국에서 유일하다고 했다.

촬영 각도가 좋다는 이유로 다리 입구의 혼잡한 고가도로에 갑자기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는 바람에 뒤따르던 차들이 급정거를 하고, 공안(公安)이 눈을 부라리고 달려와 자칫 우리는 중국 교도소를 취재할 뻔했다.

죽어도 찍소리 못할 위험천만의 곡예였지만 조용철 차장은 한국 기자 최초의 촬영일지 모른다면서 아주 흐뭇해했다. 글 쓰는 일만 코피 터지는 줄 알았는데, 사진은 목숨까지 내거는 것인가?

주유가 수군을 조련한 파양호(陽湖)에서 잡은 생선 구이위(桂魚)가 오른 저녁상이었다.

공젠화(建華) 부시장은 난창이 상대적으로 낙후한 이유와 앞으로의 발전 전망을 설명한 다음, 자본 유치(招商引資)를 위한 대규모 투자 설명회를 개최할 계획을 공개했다. 鄧은 과학기술이 생산력이라고 가르쳤지만 "친구도 훌륭한 생산력" 이라면서 한국 기업의 관심 유도를 부탁한다는 그의 요청은 마치 우리를 투자 사절단으로 대하는 기분이었다.

란저우(蘭州)에서도 샤먼(廈門)에서도 쑤저우(蘇州)에서도 그런 행사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때마다 우리는 이런 난처한 대접을 받아야 했다.

"성 문을 활짝 열고 글로벌리제이션을 실현하는" (大開省門 參與經濟全球化) 것이 상하이 시당에서 초빙한 멍젠주(孟建柱) 장시성 당서기의 모토이며, 개방이 개혁보다 중요한 것은 발전 없이 개혁은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외사교무판공실의 왕리장(王立强) 처장은 한국 도시와의 자매 결연을 바라고 있었는데, 글쎄 4천2백만 인구의 장시성에 맞을 한국의 자치단체가 어디쯤 될까?

흰 고양이와 검은 고양이 어느 것이 더 많은 쥐를 잡겠느냐는 재치 문답이 식탁의 화제로 올랐다.

은근히 내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이기에 "실험실의 흰 쥐를 빼고 쥐의 색깔은 대체로 검기 때문에 쥐는 흰 고양이의 접근을 더 쉽게 알아차릴 것입니다. 그러니 고양이 쪽에서 보자면 검은 놈이 사냥에 더 유리하겠지요" 라고 먹물 냄새 풍기는 벼락치기 답변을 제출했다. 고개들은 끄덕였지만 합격이란 표정이 아니었다.

鄧선생의 '실사구시' 가르침에 따르면 '결과적으로' 많이 잡은 놈이 정답일 터였다. 이튿날 난창을 떠나면서 다시 살펴보니 왼쪽의 검은 고양이는 발로 쥐를 움켜잡았는데 오른쪽 흰 고양이 밑에는 쥐가 없었다.

한 자료에 의하면 58년 鄧의 언동에 대한 기록이 많이 사라졌는데, 그 중에는 인민공사를 시찰한 뒤 "고기와 술은 이제 누구나 살 수 있고, 여성들이 하이힐과 립스틱을 사는 날이 곧 온다" 는 발언이 있었다고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마오쩌둥(毛澤東) 노선을 충실히 따랐다. 그러나 그 약속 이행이 어려워지면서 毛와 거리를 두었고, 마침내 62년 본래 쓰촨(四川)성의 속담이었던 고양이 논쟁을 꺼낸 것이다.

식량 증산을 위해 개인농(單幹戶)을 허용하자는 류사오치(劉少奇)와 그의 주장은 인민공사로의 집단화를 통해 사회주의 건설의 토대를 강화하려는 毛 노선에 대한 중대한 반역이었다.

아무튼 이것은 다시 75년 남쪽이든 북쪽이든 산에만 오르면 된다는 남파북파(南破北破) 소신으로 각색되고, 드디어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 (實踐是檢驗眞理的唯一標準)이란 그의 실사구시 이론으로 정립된다.

충칭(重慶)과 청두(成都)를 잇는 고속도로의 네이장(內江) 휴게소에는 휘황하게 불을 밝힌 식당이 여럿이었다. 차를 세우자마자 경쟁적으로 달려드는 식당 종업원들의 호객 행위에 오히려 우리가 당황했다.

밤 기차에서 내린 손님을 붙잡으려는 50년대 우리 역전의 여인숙 풍경이 이러했기 때문이다. 문명개체호(文明個體戶) 인증서를 정중히 '모신' 저우씨메기탕(周□魚) 집에서 저녁을 먹고,

장사가 잘 되느냐고 물었더니 주인은 "鄧선생의 개혁.개방에 감격한다" 고 머리를 조아렸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위생과 서비스는 물론이고, 한 상에 40위안짜리 메기 요리를 30위안으로 깎아준다고 슬그머니 귀띔했다.

학교 교원을 그만두고 식당을 차렸다는 그는 한 달 매상이 2천만위안을 넘으며, 월급이 3백위안 정도라는 10대의 여자 종업원은 이 일이 "아주 만족스럽다" 고 했다. 밖으로 나오니 종일 먼지를 뒤집어쓴 자동차가 깨끗하게 세차돼 있었다.

식당에 껌 장수의 순회까지 돈은 이미 '인민의 아편' 이었고, 그것은 곧 실사구시의 한 단면이기도 했다.

鄧의 고양이 이론을 한마디로 작살낸 것은 고위의 정치가도, 저명한 학자도 아니었다. 우리가 점심을 먹은 사오산(韶山) 마오씨음식점(毛家餐廳)의 20대 종업원이었다.

毛주석에게 공과가 있다면 鄧에게도 있을텐데 그의 과오가 무엇이냐는 우리 질문에 그는 "온포(溫飽) 단계를 지나 이제 자동차까지 살 수 있어 흑묘백묘의 총체적 방향은 좋았으나, 관원들이 사상적으로 변한 것 같다" 고 대답했다.

쥐 잡는 일에만 빠져 고양이의 잘못을 못본다는 항의일텐데, 무엇이 고양이의 잘못이냐고 다시 물었더니 그는 "금전의 자극으로 사상이 변질된" 공무원의 부패를 들었다.

毛의 이념과 鄧의 기술, 즉 홍(紅)과 전(專)의 싸움에서 그는 '전' 의 부패를 지적한 것이지만, 사실은 '홍' 과 해결할 문제가 더 많다.

鄧의 실사구시에는 뜻밖의 구설(□)이 따른다. 예컨대 86년 영국을 방문했을 때 그는 하이게이트의 마르크스 묘지를 참배하지 않았으나, 79년 미국 텍사스에서는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사진을 찍어 미국 언론과 시민들의 환영을 받았다는 식의 야유 말이다.

난 창 신젠(新建)현에는 문혁 당시 鄧이 근무한 트랙터 수리 공장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때 대접을 잘 했기 때문에 건강한 몸으로 돌아가서 개혁.개방의 틀을 세웠다고 현지 관리들은 농담을 건넸지만, 정작 그 공장을 한번 보여달라는 우리 요청은 정색을 하고 거절했다.

기어코 현장을 찾아는 갔으나 굳게 닫힌 철문을 여는 힘은 우리에게 없었다.

현장 방문을 막는 이유가 불행한 역사에 대한 수치 때문이 아니라 녹슨 기계와 멈춘 공장이 외국 투자가들에게 미칠 나쁜 이미지 때문이라는 '실사구시' 의 변명에는 실로 할말이 없었다. 중국 역사에 끼친 고양이의 활약치고 이보다 더한 경우가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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