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리뷰] '갈등의 핵, 유태인'

중앙일보

입력

"어째서 뉴욕의 맨해튼인가. 아랍 테러리스트들은 유대민족의 심장부가 이스라엘의 텔아비브나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이 아니라 세계 금융투자 회사의 총집결지인 뉴욕 맨해튼의 월드트레이드센터에 있음을 정확히 내다본 것이다. "

유대 민족의 4천년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신간 『갈등의 핵,유태인』의 저자 서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번 미국 심장부 테러 사태가 미국의 주장대로 오사마 빈 라덴과 그 추종자들의 소행이라면 그 출발점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둘러싼 유대인들과 아랍민족간의 갈등이며, '세계 분쟁의 몸통' 인 유대인을 있는 그대로 살펴보는 일이야말로 현재를 넘어 미래를 보는 길이라는 것이다.

미국 사회는 물론, 국제정치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유대인에 관해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는 그의 주장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번 사태 이전에 기획된 이 책의 내용은 서문처럼 '뜨겁지' 는 않다.

예를 들어 1장과 2장에서 오늘날 미국의 정치.경제.언론계를 움직이는 거물 유대인들의 면면과 이스라엘 건국을 전후한 현대사를 차분하게 짚고 있지만 중동문제의 역학관계에 중점을 두고 유대인을 분석한 책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출간을 서두른 탓에 간간이 오자라든가 여과없이 사용한 '러빙(rubbing) ' 등의 영어단어가 눈에 거슬린다. 참고도서 목록 등 자료의 출처를 따로 밝히고 있지 않은 점 역시 내용의 신뢰성에 흠을 주는 요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시기 적절한, '한권으로 읽는 유대인' 으로 제격이다.

우리 사회가 아랍권과 이슬람 문화는 물론, 유대인에 대해서도 무지하기는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우리나라 사람들과 비슷한 점이 많다느니, 배울 게 많은 민족이니, 아니면 2천년 가까이 다른 민족이 살아온 땅을 갑자기 빼앗은 나라니 하면서도 막상 그들에 대한 지식이란 기독교 구약을 중심으로 표피적 수준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재미 한국인 저널리스트가 쓴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일독의 가치가 있다.

유대인의 종교와 민족성에 관해 역사적 맥락을 통해 보게 해주고, 그들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인지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저자는 역사적 사건들이나 인물에 관해 지나치게 학술적이거나 흥미 위주로 흐르지 않고 간결명확하게 오늘날의 상황과 비교.설명해준다.

◇ 우리가 알고 있는 것?=흔히 영국도 '벨포어 선언' 을 통해 이스라엘 건국을 적극 지지했으며, 소련은 아랍권을 지지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당시 아랍권과 친했던 것은 오히려 영국이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 팔레스타인으로 향하던 10만여명의 유대인 난민들을 무력으로 사이프러스섬의 수용소로 옮기기도 했다.

이로 인해 발생한 것이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지하무장단체가 예루살렘 영국군 최고 사령부를 폭파한 '킹 데이비드 호텔 사건' 이다.

그 때 영국군과 민간인 80여명이 사망했다. 반면 유대인 강제 이주정책을 펼치기도 한 스탈린 정권하의 소련은 1947년 팔레스타인의 분할안을 다룬 유엔총회에서 이스라엘을 강력 지지하며 위성국가들과 함께 분할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또 해외에 흩어져 살던 유대 민족이 가장 차별받지 않고 자유롭게 자질을 꽃피운 시기로 꼽는 때가 뜻밖에도 이슬람교였던 스페인의 무어제국시대였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이밖에 이 책은 모세가 말더듬이라 아론의 도움을 받아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다는 구약의 내용에 대해, 모세가 원래 우상숭배에 거부감을 가진 이집트인 종교개혁가였기 때문에 히브리어를 몰라 통역이 필요했던 것이라는 프로이트의 이설 등도 소개하고 있다.

◇ 우리가 잘 모르고 있는 것=이 책의 4장은 유대 민족 마지막 독립국가였던 유데아 왕국의 멸망 이후 '디아스포라' , 즉 2천여년 간의 방랑세월을 한눈에 보여주고 있다.

예루살렘의 신전과 제사장 대신 '시냐고그' 라고 불리는 예배소와 유대경전 교사인 '랍비' 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영위하게 된 이야기, 이(異) 민족 정치.문화의 주류에 끼어들지 못하고 장사꾼으로 부를 축적해간 과정, 13세기 베네치아에서 생긴 유대인 집단 거주 지역인 '게토' 의 유래, 독일을 비롯한 동유럽과 스페인계 유대인들의 차이 등이 그것이다.

또 한뿌리에서 나온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도 알기 쉽게 설명해 준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도 기독교인들처럼 메시아의 내림을 믿지만, 메시아가 오면 세상의 불의가 없어지고 가난 등이 사라지는 평화의 시대가 돼야 하는데, 아직 세상이 그렇게 바뀌지 않았으니 예수 역시 출중한 랍비였을 뿐이라고 해석한다는 것이다.

◇ 우리가 배워야 할 것=저자는 유대인이 대체로 구두쇠로 알려져 있지만 기부금 지출은 전혀 아끼지 않는다고 칭찬한다.

99년 자료에 따르면 미국에서 가장 많은 기부금을 매년 정기적으로 내놓고 있는 부호 1백명 가운데 35%가 유대계며, 강한 혈족 지원 의식 때문에 능력은 있는데 돈이 없어 학업을 중단한다든가 연구실을 갖지 못하는 과학자란 유대인 종족에는 없다는 것이다.

또 오랫동안 거주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살아온 탓인지 유대인들의 '부' 개념은 토지나 건물 같은 부동산이 아니라 머리 속의 지식에 있기 때문에 더욱 교육을 중시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는 무엇보다 유대인을 '역경을 기회로 바꾸는 민족' 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한다.

항상 분쟁의 중심에 서게 되는 것도 온 몸을 던져 언제나 새로운 한계에 도전하다보니 정치.경제.문화.사회 모든 면에서 갈등이 따랐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이렇게 긍정적인 저자의 입장에서 쓴 글이지만 현재의 사태에 대한 균형적인 시각을 깨뜨릴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균형을 잡기 위해 한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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