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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방 간 장관, 15m 뒷걸음질 치다 '꽈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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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무소속으로 대선에 나오려던 안철수씨의 후보 사퇴로 수면 아래로 내려갔던 안씨의 공약인 ‘청와대 이전’이 다시 살아났다.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가 안씨의 주장을 일부 수용하면서다.

 문 후보는 12일 “대통령이 되면 대통령 집무실을 광화문 정부 중앙청사로 이전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구중궁궐 같은 청와대를 나와 국민들 속으로 들어가 늘 소통하고 함께하겠다. 청와대는 개방해 국민께 돌려드리겠다”며 이같이 밝혔다. 이어 “청와대를 국민에게 돌려드리면 북악산까지 완전 개방이 가능하고 국민들에게 새로운 휴식의 명소가 생기게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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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와대 비서실장 출신인 그는 이런 취지의 말을 했다. “(청와대는) 비서실조차 대통령과 멀리 떨어져서 비서실상이 대통령을 만나려 해도 차를 타고 가야 하는 권위적인 곳이다. 그 넓은 청와대 거의 대부분이 대통령을 위한 공간이고, 극히 작은 일부가 수백 명 비서실 직원들의 업무 공간으로 사용하는 이상한 곳이었다. 제가 청와대에 근무할 때부터 잘못된 것이란 생각을 품어 왔다. 대통령이 된다면 실천해 보겠다.”

 청와대의 공간 구조상의 문제점은 1991년 완공됐을 때부터 제기됐었다. 당시 한 해 국가 예산이 31조원이었을 때 200억원을 넘게 들여 “천년을 두고 길이 보존해야 할 민족문화재”(임재길 당시 총무수석)가 되도록 지었다지만 실제론 ‘임금의 거처’란 개념이었다. 그동안 제기돼 왔던 문제점도 거기에서 출발한다. 대통령 집무실의 경우 대통령 방 출입문에서 대통령 의자까지 거리가 15m에 달해 장관이 보고를 마친 뒤 수십 걸음을 뒷걸음질쳐 나오다 다리가 꼬여 넘어진 일도 있었다.

 이 때문에 청와대 본관에 한두 번이라도 다녀온 사람들 대부분은 청와대도 민주주의 선진국처럼 대통령과 참모들이 언제든 와이셔츠 차림으로 만나 대화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곤 했다. 정치학자는 물론 건축가도 같은 주장이었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이런 환경은 권위주의엔 어울릴 수 있을지 모르나 민주주의와는 병립하기 어렵다. 설령 민주적으로 선출되었다 하더라도 그가 플라톤이 말하는 철학자 왕이 아닌 다음에야 이런 환경에서 민주적 대통령이 되는 건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건축가 승효상씨도 “청와대란 공간 탓에 대통령의 사고와 행동도 권위적이 된다. 대통령이 말년에 비참해지는 건 그런 건물에서 5년을 살아서”라고 했었다.

 김영삼(YS) 대통령 이래 대통령들도 공감하곤 했다. 당선인 시절엔 청와대 집무실을 옮기겠다는 약속을 했다. 문 후보가 이날 말한 광화문 정부 중앙청사 이전은 YS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공약이었다.

 두 대통령은 시도했으나 결국 포기했다. 당시 청와대 경호실에서 일했던 한 인사는 “ 대통령이 정부 중앙청사에 있게 되면 사실상 그 건물의 경호 통제가 굉장히 강해져야 한다”며 “함께 입주한 부처도, 그 부처를 이용해야 하는 민원인들도, 주변 사람들도 엄청 불편해질 수밖에 없다는 점 때문에 결국 유야무야된 것”이라고 전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은 대신 청와대 본관을 개조하는 걸 검토했다. 이 대통령이 널찍한 집무실을 걷다가 “너무 넓어 운동해도 되겠구먼”이라고 말한 뒤 리노베이션을 지시한 일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역시 이뤄지지 않았다. 청와대 관계자는 “층고가 3m 가까이 되는 데다 의외로 자투리 공간이 잘 안 나왔다”고 했다. 수백억원에 달하는 예산도 문제였다. 청와대의 1년 예산은 1600억원 정도다. 국회가 청와대 공간 재배치 공사를 위해 10% 이상 증액해 줄 것으로 기대하는 이는 거의 없다. 이 때문에 노 전 대통령은 대신 비서동을 하나 짓고 거기에 집무실을 마련했다.

 이명박 대통령 때인 2008년 말엔 청와대 내에서 “다음 정부부터라도 제대로 일할 수 있게 아예 비서동을 크게 짓자”는 얘기가 나왔다고 한다. 비서동이 세 동으로 나뉜 데다 그중 두 동이 재난위험시설 D등급인 만큼 아예 돈을 더 들여서 대통령과 참모들이 함께 근무할 수 있도록 마스터플랜을 짜자는 논의였다. 대충 200억원 정도로 예상됐다고 한다.

 그러나 그 계획 또한 흐지부지됐다. 청와대의 한 인사는 “가설계만이라도 해두고 가자고 했으나 막대한 예산을 쓰자고 하는 게 정치적으로 부담이 된다고 했다”고 전했다.

 결국 본관 개조든, 비서동 신축이든 예산이 문제였던 셈이다. 사실 국회는 지금껏 청와대의 구조에 별다른 관심을 보여오지 않았다. 올 국회 운영위에선 장다사로 청와대 총무기획관이 “총리실 등이 빠져나가니 정부 중앙청사에 빈 공간이 좀 생긴다. 청와대 비서실이 그리로 임시 이전해 일할 수 있으니 비가 새는 것만이라도 고치게 해 달라”고 했으나 의원들은 “그간 계속 불용 처리돼 오지 않았느냐”며 냉소적이었다고 한다. 가상준(정치외교) 단국대 교수는 “국회도 ‘제왕적 대통령’이란 비난만 할 게 아니라 민주적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한다”며 “청와대 공간을 재구성하는 건 국회도 협조할 사안”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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