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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 스타] '천년호' 주연 정준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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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면

옛말에 배가 불러야 예절을 안다고 했다. 이를 배우에게 적용하면 어떨까. 억지소리같지만 일단 스타가 돼야 연기를 다질 여유도 생기지 않을까. 인기 정상의 정준호(34)에겐 다소 미안하나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난 11일 오후 7시 중국 저장성(浙江省)의 고도 항저우(杭州).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느라 곳곳이 공사장인 도심을 지나 한 시간여 달리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어둠에 감싸인 한적한 산야, 영화 '천년호'(千年湖.감독 이광훈, 제작 한맥영화) 촬영장이다.

진흙길을 따라 10여분 걸으니 온통 침엽수림이다. 하늘 높이 곧추 자란 나무 사이로 정준호가 말을 달리고 있다. 늠름하다. 바람에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에서 당찬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두사부일체''가문의 영광'의 정준호 맞아? 고등학교에 들어가 생난리를 친 조폭 중간보스(두사부일체)나 조폭 집안의 사위가 된 소심한 엘리트(가문의 영광)의 가벼운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사실 두 영화 이전에 정준호는 그리 돋보이지 않았다. 드라마.영화에 자주 비쳤으나 '내 것'이라고 할 만한 작품은 별로 없었다. 흠잡을 데 없는 준수한 연기자란 평가였지만 그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황소걸음을 걸어왔다.

***사랑하는 여인 잃는 장군役

그가 출연한 카드 광고처럼 '열심히 일한 당신'이었다. 코미디.액션.멜로 등 장르도 가리지 않았다. '흑수선''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줘' 등 최근 2년간 출연한 영화만 다섯편에 이른다. 그리고 지난해 최고 흥행작 '가문의 영광'으로 충무로에 우뚝 섰다.

"제가 모르는 사이에 스타가 됐어요. 자신을 돌아보고 내실을 쌓을 만한 여유가 부족했을 정도로요. 앞으론 그걸 채워가야 할 것 같아요."

쉽지 않은 자기 고백이다. 약간 부풀리면 과거와의 단절, 아니 '배우 정준호'의 재탄생 각오로도 들린다. "제 모든 걸 '천년호'에 걸었죠. 배우로서의 결정체를 담고 싶습니다"며 강한 애착을 보였다. 조폭 코미디라는 열기구를 타고 높이 치솟은 자신에 대한 중간 점검이다.

'천년호'는 중국에서 1백% 촬영하는 액션 멜로극이다. 정준호는 진성여왕(김혜리)의 총애를 받으면서도 정작 본인은 순수한 소녀 자운비(김효진)를 사랑하는 신라 장수 비하랑을 맡았다. 진성여왕의 질투 앞에서 결혼까지 약속한 여인을 잃는 비극적 캐릭터다.

'천년호'는 이런 3각 구도에 당대의 혼란스런 사회상과 신라 건국시조 박혁거세에게 전멸당한 아우타족의 원한을 겹쳐놓았다. 아우타의 혼령이 살해된 자운비에 덧씌워지며 이야기 얼개가 촘촘해진다. 여기에 팬터지.호러 분위기가 가미됐다.

이날 촬영분은 영화의 하이라이트. 여왕의 호위무사에게 부상을 하고 도망치는 아우타(반은 자운비)를 비하랑이 말을 타고 추격하는 장면을 클로즈업했다.

대형 크레인에 연결된 와이어(피아노줄)에 몸을 맡기고 허공을 가르는 김효진의 동작이 날렵하다. 과거의 여인(자운비)과 현재의 악귀(아우타)가 한몸에 섞인 김효진을 쫓아가는 정준호의 낯빛도 곤혹스럽다.

"지금까지 살갗을 간지르는 연기를 했다면 이번에 피부 깊숙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줄 겁니다. 즉 고통스런 내면을 드러내야 하죠. 귀신으로 변한 옛 사랑을 처단해야 하는 장수의 모순된 운명에 매료됐어요. 대단한 멜로영화인 셈입니다. 액션과 팬터지는 부차적 사항입니다. 액션 신은 대개 두세 차례에 끝냈지만 마음을 주고받는 사랑 신에선 자청해 스무번 넘게 찍은 적도 있어요."

***고독한 내면연기로 승부수

'천년호'는 정준호의 두번째 중국촬영 작품. 전작 '아나키스트'(2000년)도 중국에서 찍었다. 그래서 신현준.장동건.정우성 등 절친한 배우들은 그의 중국행을 말렸다. "뭐하러 고생을 두번이나 사서 하느냐"는 것이다. 게다가 이번엔 40㎏의 갑옷을 입어야 하지 않는가.

"알맹이가 튼실한 영화라 놓칠 수 없었습니다. 몸고생은 잠시뿐이죠. 겉치장만 요란한 블록버스터가 절대 아닙니다."

그는 10년간 피우던 담배도 끊었다. 달라진 자신을 드러낼 징표가 필요했던 것. 그만큼 꽉 찬 자신을 희망하고, 그윽한 연기를 갈망해온 것일까. "지난해 설경구가 부럽기도 했다"는 말에서 그의 지금 심정을 읽을 수 있다.

그 결과는 '천년호'가 개봉되는 7월께 나오리라. 드라마와 화면이 척척 맞아떨어지는 우리나라 대작영화는 그만의 소망이 아닐 것이다. 1969년 신상옥 감독의 괴기영화 '천년호'(千年狐)를 2003년 시점에서 재발견한다는 의미도 각별하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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