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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남파병|을사년 정국의 분기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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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지난해 [크리스머스]를 전후해서 한·미군 수뇌들 사이에는 내막을 알길 없는 [이례적인 회합]이 빈번했다. 연말이 가까운 어느날 당시 합동참모본부장 김종오대장과 [유엔]군 사령관 [하우스]대장은 1주일이상 거듭됐던 한·미군 수뇌 회합에 매듭을 짓고 굳은 악수를 나누었다. 이 거듭된 회합은우리 건군사상 최초로 2천여명의 병력(비둘기부대)을 월남에 파병하기위한 절차를 마련한 것이란 사실이 알려진 것은 그 훨씬 뒤의 일인 것이다.
정부는 거듭된 국가안전보장회의의 신중한 검토를 거쳐 『파병뒤에 오는 사태를 낙관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파병방침은 굳어졌다. 그로부터 10여일이 지난 1월8일 월남파병은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국회에 제안됨으로써 [클로스업]됐다. 월남파병문제는 새해들어 첫번째의 정치적 [이슈]로 등장, 세계속의 [한국]을 가늠해보는 모처럼의 거시적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 논란은 한·일협정비준파동에 겹쳐들어 촛점을 잃은채 단편적인 입씨름으로 바뀌어갔다.
정부, 국회, 여·야등의 정책참여자는 제나름의 입장에 얽매인 가운데 두차례 월남파병의 방관자가 돼야했다.
국군의 월남파병은 애초부터 미국을 비롯한 자유우방과의 [상관관계에 직결되어 추진됐다. 작년 6월9일 미국무성이 25개국 자유우방에 대해 월남지원을 호소했고 뒤이어 국방당국은 파병의 가능성을 검토했다는 것이 정부고위층의 얘기다. 그러나 그해 9월 의무부대 2백여명을 파월한 뒤, 금년 1월에 비전투부대, 7월에 1개 전투사단을 각각 파월하기까지 정부와 국회는 내외면으로 진통을 겪었다.
이 진통은 곧 [국회=실리], [정부=명분]이란 두갈래의 굵은 선으로 드러났다. 특히 비준파동직전에 국회 동의를 얻은 1개 전투사단(맹호·청룡부대)의 증파문제는 미·일·월의 틈바구니에 낀 우리국가 이해관계의 심각한 논쟁으로까지 번졌다. 7월2일 국무회의가 [1개 전투사단 및 필요한 지원부대]의 월남파병을 의결한데 이어 [미국의 월남전에 필요한 군수물자 대일발주]설이 떠돌게되자 국회의 여·야의원들은 미국의 대일편중정책이라고 비난, 증파문제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신중론내지 반대론으로 급격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공화당의 차지철 박종태 김정근 서인석 송한철의원등 일부 소장의원들과 민중당의 정일형 황인원의원등 대부분의 야당의원들은 미국의 대한정책이 근본적으로 시정돼야 한다면서 ①한·미·월 삼각무역관계 ②군원이관 중단 ③한·미방위조약의 보완 ④국군의 처우개선과 장비현대화등의 충분한 보장책을 요구했다. 일부 야당의원들은 심지어 『한국에서 반미사태가 일어난다면 미국의 대한정책이 좀더 성의있고 투명해 질 것』이라고 극언하면서 『실리만 느는 가운데 국제적 기아가 될까 우려된다』고 경고했다.
이에 맞서 정부는 자유진영의 공동방위, 6·25전란시 지원에 대한 신의등 명분론을 앞세워 월남파병에 대한 국회동의를 관철시키고자 적극 공세를 폈다. 파병에 찬동하는 여·야의원들은 이 명분론을 그대로 들고나섰으며 정부의 적극자세는 미국정책의 강력한 뒷받침아래 정회파동에 말려든 국회의 허점을 꿰뚫으면서 펼쳐졌다. 그러나 정부자체도 아·아[블록]을 상대로한 다변외교정책을 재검토해야하는 난관에 부딪쳤다.
정부의 이런 고민은 파병을 반대하는 일부 야당의 주장과 상통했다. 한마디로 월남파병문제에 대한 국회·정부의 자세와 여·야의 입장은 갈래갈래 찢어진 난맥상이었다. 미국의 극동정책으로 다루어지는 [어쩔수 없는 상황에 몰두된 나머지 주체적인 자세를 가다듬는데 너무도 소홀했다.
적어도 정부가 파병방침을 굳히기전에 범국민적인 여론을 들어 신중히 다루려는 자세를 보였어야하며(차지철의원의 말), 이를 다루는 국회도 실효있는 논거를 종합했어야(손원일씨의 말)하는 아쉬움을 남겨놓았다. 더구나 두차례에 걸친 대병력의 파병이 정식 발표되기 1주일전에 각각 누설된 공통점은 [군사기밀]과 국가적 이념의 구별을 뚜렷이 해야한다는 또하나의 과제를 남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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