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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 시집 '사랑을 놓치다' 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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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가는 길이 맞느냐 묻고 싶은 듯/길 복판에 멈춰 섰다가, /아주 가기는 싫은 듯 은행잎 단풍잎 함께/차에도 밟혔다가 구둣발에도 눌렸다가, /아무나 붙잡고 달려보다가/엎어졌다가, 뒹굴다가/납작해졌다가, 봉긋해졌다가/집 나온 강아지모양 쭈뼛거리다가/부르르르 떨다가/결심한 듯 차고 일어나는/검은 비닐 봉다리. /가벼운 안녕. "

1987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한 시인 윤제림(42) 씨가 네번째 시집 『사랑을 놓치다』(문학동네.5천원) 를 펴냈다. 위 시 '가벼운 안녕' 전문에서 볼 수 있듯 이번 시집에 실린 윤씨의 시들은 우선 따뜻하고 넉넉하다.

가을 바람에 날리는 낙엽이 아니라 '검은 비닐 봉다리' 에까지 시인의 마음을 가볍게 붙들어 맬줄 안다. 비교적 젊은 시인이면서도 동체대비(同體大悲) 라는 우주적 생명론을 육화할 수 있는 드문 시인이다.

"공양간 앞 나무백일홍과, /우산도 없이 심검당 섬돌을 내려서는/여남은 명의 비구니들과, /언제 끝날꼬 중창불사/기왓장들과, /거기 쓰인 희끗한 이름들과/석재들과 그 틈에 돋아나는/이끼들과, /삐죽삐죽 이마빡을 내미는/잡풀꽃들과, //목숨들과/목숨도 아닌 것들과," ( '함께 젖다' 전문)

나무백일홍.비구니.이끼.잡풀꽃들이 모두 함께 젖고 있다. 사찰마다 눈꼴 사나운 중창불사의 기왓장.석재 등과 이름을 남기려는 헛된 욕심까지도, 생명 있는 것과 없는 것들도 모두모두 시인의 눈에는 시인과 동격이다.

그 눈은 선과 악 등 모든 이분법을 없애고 넌짓한 웃음으로 바라보는 부처의 품과도 같다. 나는 곧 또 나 아닌 모든 것이어서 내 몸이 아프면 지구 전체가 아프니 삼라만상 서로 잘 보살피며 살자는 상생(相生) 의 동체대비가 심오한 사상으로서가 아니라 가볍게, 인간답게 시집 전체에 흐르고 있다.

"세상 모든 외할머니의 얼굴을 한/할머니 한 분이,치악산 가을볕 아래/고추를 고르고 앉으셨네. /세상 모든 외손주들의 고추를/주무르듯이. //원보네 외할머니 저 뜨듯한 손에/가버린 내 일곱살의 고추도 한번/잡히고 싶어라. "

'박경리 선생의 사진을 보며' 란 부제가 딸린 시 '외할머니' 전문이다.

투명한 가을 햇살아래 '모든 외할머니' 의 시간은 정지되어 있다. 아니 '내 일곱살' 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해 있다.

그런 윤회의 시간을 다루면서도 '고추도 한번 잡히고 싶어라' 는 참으로 인간적인 웃음까지도 윤씨의 시들은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너무 일찍 부처님 웃음의 뜻을 알아챘는가, 아니면 영글 것들을 두고두고 남겨놓겠다는 것일까. 막히고 맺혀야 시인 것을, 막힘 없이 줄줄 흐르는 아직 젊은 시인의 시가 한편으론 위태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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