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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금이 산모를 앗아갔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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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통금의 역사가 우리에게 강요한 정신적·물질적 피해는 이루 매거할 겨를도 없겠거니와 이번엔 통금이 마침내 한 산모의 목숨을 앗아가는 처절한 사건을 낳고 말았다.
지난 4일 새벽4시, 수혈을 기다리던 한 산모는 통금이 혈액의 수송을 저해했기 때문에 억울하게 고혼이 되었다는 것이다. 의정부에서 일어난 이 돌연하면서도 당연한 참사는 이제 다시금 우리들에게 냉혹한 통금의 불합리를 일깨워준다. 피만 있으면 생명의 고귀를 지킬 수 있었던 부인.
그는 단 하나의 이유, 피를 구하러 급하게 서울로 달려왔던 간호원이 통금에 발묶였던 때문에 죽어간 것이다.
이 부인을 에워싼 비통은 결코 고립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와 조금치도 다름없는 자유시민이요, 그의 처지는 우리의 그것과 또한 촌호도 다름이 없다.
자리만 바꾸어 놓는다면 그러한 불행은 우리 누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인 것이다. 이러한 엄청난 불합리와 자유시민권에 대한 엄청난 원천적 침해가 어찌하여 이날 이때까지 살아 남았었느냐에 대해 우리는 새삼스러운 허망을 씹는 것이다.
통금이 유독 창피하게도 우리나라에만 항존했던 것이요, 물질적인 면에서 간접생산재수송을 포함한 야간생산활동을 심하게 억제하였던 것이며, 정신적인 면에서 왜곡된 민주주의의 생활상을 이 땅에 부식시킬 따름이었다는 것은 이미 10수년을 두고 식자들에 의한 한결같은 지탄을 받아온 터이었다.
더우기나 충청북도나 제주도 같이 시험적으로 통금을 해제한 지역에서의 범죄통계나 간첩도량기록이 월등한 역조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실증적사실을 든다하여도 통금이 얼마나 익 보다 해가 앞서는 것인가의 판단은 쉽게 내려진다.
통금이 국민생활의 활력을 거세안하고 위축시키지 않았다고 오늘 어느 누가 장담하고 나설 것인가.
우리가 알기로는 삼엄한 통금 아래서도 새벽 2시반까지 영업을 하는 [나이트·클럽]이 있으나, 심야를 거리낌없이 질주하는 차량이 있으며,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그 영업소는 누구를 상대하는 것이며 밤거리를 활보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또한 우리가 보기로는 근래의 끔찍한 반국가적, 반사회적 사건들이 통금이 있음으로써 오히려 수월하게 저질러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통금을 당연히 있어야하고, 또 언제 어디서나 있는 것 같은 환각으로 살아온 것 같다. 놀라운 불감이며, 시민정신의 좌절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 타성에 좇아 침묵을 지킬 수가 없다. 너무도 애처롭고 뼈아픈 참사를 우리는 눈앞에 한다. 통금이 없었던들 지금쯤 화려한 웃음의 꽂을 피우고 있을 여인, 그것도 산모를 우리는 잃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통금은 죄없는 한 산모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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