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이진법 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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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정거장에서 인간과 외계인 수학자가 만났다. 고급수학을 논하는 자리였지만 숫자 개념부터 맞지 않았다. 인간이 '13'이라는데 외계인은 '1101'이라는 식이었다.

한참 갸우뚱대던 인간은 외계인의 손을 보고서야 이유를 알게 됐다. 외계인의 손가락이 두 개밖에 없었던 것이다. 0부터 9까지 쓰는 십진법의 인간과 0과 1로만 수를 나타내는 이진법의 외계인의 셈이 맞을 리 없었다. 둘의 셈법은 이랬다.

인간:13=1×(10)+3

외계인:1101=1×(23)+1×(22)+0×(2)+1

광의의 이진법(二進法)은 0과 1, ○와 ×, 예스(yes)와 노(no) 등으로 따지는 방식이다. 손가락이 열 개인 인간에게 언제 봐도 생소하지만 십진법보다 논리 조립이 간단하고 전자.전기 신호로 나타내기 편리하다. 인류가 언제부터 이진법을 생각해 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영(零)'을 이해하기 시작한 기원전 7세기 고대 인도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이 있다.

이진법은 근.현대 정보통신 혁명의 원동력이었다. 우리가 쓰는 컴퓨터는 전자회로에 0(전자 흐름 없음), 1(흐름)이 엇갈리면서 연산.문자를 만들어낸다. '디지털'이라는 말이 나오기 전부터 이진법은 통신혁명을 이끌었다.

미국 발명가 새뮤얼 핀리 모스는 1843년 철자와 숫자를 길고(○) 짧은(×) 충격전류로 암호화해 모스 전신부호를 만들어냈다. 알파벳 a는 단-장, b는 장-단-단 식으로 정한 것이다. 20세기 개발된 인쇄기 달린 통신장치인 텔렉스(telex)도 이진법의 산물이다.

최근 외국의 한 연구기관은 이진법이 세계를 최소한 1천배 빠르게 만들었다는 결과를 냈다. 이진법이 디지털 혁명을 일으키면서 아날로그 시대보다 정보처리 능력을 눈부시게 끌어올렸다. 21세기도 당분간 이진법의 세상이 될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진법이 통신.컴퓨터뿐 아니라 인간의 사고체계에 영향을 준다고 주장한다. 요즘 정권교체를 앞두고 나오는 보도 내용만 보면 세상이 정말 이진법에 홀려 있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는 ○, 누구는 ×라고 한다.

검찰총장의 임기 보장과 대기업 구조조정본부의 폐지 등을 놓고는 '한다''안한다'를 반복한다. 0과 1로 이어지는 텔렉스를 받아보는 느낌이다. 가끔은 열 손가락을 꼽으며 헤아려 보자. 세상에 몇 가지 생각이 있는지. 모자라면 발가락까지 써도 좋다.

이규연 사건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