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분석] 하우스푸어 4만~157만 들쭉날쭉 기관마다 달라 정책 혼란 가중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2면

회사원 정모(38)씨는 자신이 ‘하우스푸어’라고 느낀다. 5년 전 5억5000만원에 산 집이 요즘 4억원까지 떨어졌다. 결혼과 출산 탓에 당시 받았던 대출금 2억원은 그다지 줄지 않았다. 몇 달 전 은행의 요구로 이자만 내던 대출을 원리금 분할상환으로 바꾸면서 부인과 맞벌이해서 번 소득의 30% 가까이가 대출금 상환에 나간다. 먹는 것부터 자녀 학원비까지 모든 걸 줄이고 있다. 하지만 정씨는 자신이 공식적인 하우스푸어인지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 대출액이 담보가치(3억3000만원)를 넘어서지 않고, 빚을 갚아나갈 능력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정씨는 “대선주자까지 하우스푸어를 지원하겠다는데 대상인지 아닌지가 분명치 않아 혼란스럽다”고 푸념했다.

 하우스푸어를 둘러싼 논란이 커지고 있다. 정부와 민간기관이 내놓는 하우스푸어 숫자가 제각기 다른 데다 국민의 체감과도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은 2일 ‘1개월 이상 주택담보대출 원리금을 연체하고 있는 사람이 4만 가구, 현재 경매 낙찰률(시가의 76.4%)대로 집을 팔아도 담보대출을 상환하지 못하는 사람이 19만 가구’라고 밝혔다. 이미 하우스푸어인 사람이 4만 가구, 잠재적 위험군이 19만 가구란 뜻이다. 한 달 전 금융연구원은 이 숫자를 10만1000가구(고위험군)~57만 가구(잠재적 위험군)로 추정했다. KB금융연구원은 지난해를 기준으로 7만 가구로 보고 있다. 새누리당(28만4000가구)과 현대경제연구원(108만4000~156만9000가구)의 추정치도 있다. 김광수경제연구소는 2010년에 이미 198만 명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숫자가 제각각인 건 시각 차이 탓이다. 하우스푸어는 보통 ‘대출금을 갚느라 생활고를 겪는 사람’을 일컫는다. ‘생활고’에 대한 판단에서 주관이 개입될 소지가 크다. 한국갤럽은 9월 ‘주택보유자 10가구 중 2가구가 스스로 하우스푸어라고 생각한다’는 설문 결과를 내놨다. 취업 정보업체인 잡코리아가 10월 집이 있는 직장인에게 물어보니 49%가 본인을 하우스푸어라고 대답했다. 이준협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살림이 빡빡해진 국민의 상당수가 대출 상환 부담을 이전보다 더 크게 느끼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하우스푸어가 이렇게 많지는 않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기관을 마냥 믿을 수도 없다. 하우스푸어의 범위와 산출 방식에 따라 한 기관에서도 여러 숫자를 내놓고 있어서다. 새누리당은 부채가 자산보다 많은 가구를 하우스푸어로 봤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소득 대비 부채부담을 기준으로 했다. 현재로선 금감원 집계가 가장 정확한 것으로 평가된다. 금감원은 각 은행으로부터 직접 받은 자료를 토대로 하우스푸어 규모를 산출했다. 다른 기관의 숫자는 통계청의 가계금융조사 등을 토대로 한 추정치다. 하지만 금감원 집계도 전·월세 보증금을 감안하지 않았다는 허점이 있다.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돌려줘야 할 이 돈을 부채로 간주하면 하우스푸어의 숫자는 훨씬 많아진다. 강민석 KB경영연구소 부동산팀장은 “소득과 자산·부채를 모두 고려하지 않으면 여러 채의 집을 갖고 버티는 사람까지 하우스푸어로 분류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대선을 앞둔 정치권도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와 문재인 민주당 후보 모두 ‘하우스푸어 해소’를 주요 공약으로 내걸고 있다. 이장혁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하우스푸어의 정확한 개념과 숫자도 모르는 상태에서 제대로 된 정책이 나올 수 없다”며 “집도 없이 생활고를 겪는 렌트푸어 등과의 형평성과 금융기관의 역할 분담 등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부분이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