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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카페]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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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나카자와 신이치 지음/김옥희 옮김, 동아시아, 1만원

최근 몇년새 신화가 유행이다. 그러나 정작 신화가 '지금, 여기'에서 갖는 의미는 그다지 사고되지 않았다. 진기한 것에 대한 호기심 차원이거나 유치한 수준의 팬터지와 동일시해 온 게 아닌가 싶다.

일상에서 부터 첨단문명까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인류 정신의 원형'으로서의 신화가 갖는 역동성은 아직 구체적으로 포착되지 않고 있다.

일본의 주목받는 소장학자 나카자와 신이치(中澤新一.52.사진)가 지난해에 발간한 이 책은 한국의 신화 바람이 놓치고 있는 공백을 메워주는 역작이다.

가라타니 고진 등과 더불어 현대 일본의 지성을 대표하는 철학자이며 종교학자이자 스타일과 성격, 그리고 글까지 '튀는 지식인'으로 분류되는 그는 풍부한 인문학적 근거를 통해 신화가 오늘의 문제를 푸는 한 단서가 될 수 있음을 입증한다.

책의 제목처럼 나카자와는 신화란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오래된(最古)된 철학이라고 보고 있다. 본래 대학 강의록에 토대를 둔 저작이기 때문에 '라이브한 분위기'가 살아 있는 그의 책에 따르면 신화는 약 3만년 전 구석기 시대에 최초의 불꽃을 일으켰다.

이 구석기인이 '감각의 논리'를 구사해 우주 속의 인간을 사고한 결과물이 신화라는 것이다. 철저히 인간의 현실에 기반했다는 점에서 신화는 관념에 의존하는 팬터지나 종교와 구별된다.

또 오감을 모두 동원한 '감각의 논리'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인간 이성에만 기대는 서양과학이나 현대 철학보다도 더 포괄적이고 싱싱하다. 따라서 신화의 정수를 제대로 포착하면 현대 과학이나 종교가 속수무책인 부분에서 치유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 책의 백미는 전 세계에 4백50종이나 분포돼 있다는 '신데렐라'이야기를 통해 '잃어버린 신발 한짝'의 숨겨진 의미를 캐내는 과정이다.

현대판 신데렐라 스토리는 새 엄마의 두 딸에게 수난받던 소녀가 잃어버린 유리 구두 한짝을 통해 왕자와 맺어진다는 내용이다. 유럽과 유라시아 대륙에 고르게 분포한 신데렐라 모티브에는 반드시 여주인공이 신발 한짝을 잃어버리게 된다.

여기서 저자는 신데렐라 이야기를 오이디푸스와 연관짓는다. 오이디푸스는 '절뚝거린다'는 의미라는 것. 신데렐라도 신발 한짝으로는 절뚝거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절름발이는 모든 신화에서 저승과 이승을 연결하는 '중개'역을 맡아왔다. 결국 저자는 신화란 이분법적인 세계를 잇는 중개 역할이 본원적 기능이라는 결론을 끌어낸다. 나카자와는 IT산업으로 대표되는 현대문명은 점차 가상세계화한다고 우려한다.

전자화된 이미지와 정보만을 소비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인간적 조건과 구체성을 상실해가는 정보산업을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이런 때일수록 가상과 현실을 '중개'하는 신화가 존중받아야 된다고 주장한다.

일본 고단샤의 '가이에바 소바주'(야생적 사고의 산책)시리즈의 첫권인 이 책은 같은 자료라도 그것이 인문학적 소양으로 걸러질 때, 얼마나 풍성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고사(枯死)중인 인문학'의 재생에 암시를 주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영기 기자

<바로잡습니다>
◇1월 11일자 B3면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 기사 중 '가이에바 소바주'는 '가이에 소바주', 사진 설명 중 '아프로디테와 비너스'는 '아프로디테와 에로스'의 잘못이기에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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