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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96) 쑹아이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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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꾸이전은 막내딸 쑹메이링과 장제스의 결혼을 탐탁해하지 않았다. 둘째딸 칭링만 빼고는 모두 찬성했지만 굽히지 않았다. “소금장수 집 아들을 가족으로 맞아들일 수 없다. 교회 문턱에도 와 본 적이 없는 흉악한 사람이다. 게다가 군인이다.” 군인의 사회적 지위가 낮을 때였다. 어디서 들었는지, 장제스의 복잡한 여자관계도 훤히 알고 있었다.

큰딸 아이링이 “군인도 군인 나름이다. 서양 언론에서 위대한 정복자 소리를 듣는 사람이다. 아버지와 쑨원 모두 세상을 떠났다. 장제스 외에는 우리 집안을 보호해 줄 사람이 없다. 여자 문제는 이미 정리했다”고 설득해도 듣지 않았다.

세상 어느 것도 누구와 결혼하겠다고 맘먹은 여자 마음을 돌이킬 수는 없는 법, 쑹메이링은 태연했다. 걱정하지 말라며 장제스를 안심시켰다. “엄마는 둘째언니가 부인이 있는 쑨원과 결혼한 다음부터 처자가 있으면서 딴짓 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한다. 군인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도 자주 했다.” 장제스는 얼굴 내리깔고, 땀 뻘뻘 흘리며, 어색한 웃음만 지었다.

쑹씨 집안 사람들은 무슨 일만 있으면 일본을 피신처로 삼는 습관이 있었다. 니꾸이전은 장제스가 인사 오겠다고 하자 일본으로 몸을 피했다. 모친이 없는 틈에 큰딸 아이링이 일을 저질렀다.

1927년 9월 16일, 상하이 쑹아이링의 집 거실에 기자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아이링의 입에서 “내 동생 메이링이 장제스와 결혼한다”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기자들은 총알처럼 밖으로 튀어나갔다.

이튿날 중국과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신문의 1면은 장제스와 쑹메이링의 결혼 소식 외에는 볼 만한 기사가 없었다. 뉴욕타임스가 가장 상세했다. “중국은 원래 이혼이란 말이 없다. 장 총사령관은 고향에 있는 부인과 휴처제(休妻制)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쑹메이링도 미국 유학 시절부터 연인 사이였던 류지원과 완전히 갈라섰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평소 양복을 입어 본 적이 없는 장제스를 위해 쿵샹시의 부인 쑹아이링이 런던의 일류 양복점 재단사를 상하이로 초빙했다.”

장제스는 쑹아이링이 시키는 대로 일본행을 서둘렀다. 출발 전날 성명서까지 발표했다. “쑹 여사와 나의 혼인은 남들이 말하는 것처럼 정략결혼이 아니다. 모든 남녀관계가 그런 것처럼 우연히 만나서 여기까지 왔을 뿐이다. 아직 쑹 여사 모친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고베에서 요양 중인 노부인 찾아뵙고 따님과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구걸하듯이 할 참이다. 다른 볼일은 없다.”

소식을 듣고도 설마하던 니꾸이전은 장제스가 나가사키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자 가마쿠라의 작은 여관으로 거처를 옮겨 버렸다. 포기할 장제스가 아니었다.

말끔한 양복에 면도까지 하고 가마쿠라까지 찾아온 장제스를 니꾸이전은 피할 방법이 없었다. 두 사람의 생생한 기록이 남아 있다. “고향에 있는 부인은 어쩔 셈인가.” 장제스는 침착했다. “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습니다. 첩과도 관계를 정리했습니다. 두 사람 말고 함께 생활하던 여인이 한 명 있었습니다. 얼마 전 미국 유학을 떠났습니다. 다시는 중국에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원래 절차를 밟지 않은 사이라 문제될 게 없습니다.”

장제스가 고향에서 만들어 온 이혼서류를 두 손으로 건네자 니꾸이전은 볼 필요 없다며 손을 휘저었다. 이어서 장제스가 상상도 못했던 질문을 던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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