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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의 진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경구가로 유명한 [리히텐베르크]는 신문에 대해서도 촌철살인적인 비판을 가했다. 그는 1년분의 신문을 한책으로 철하여 통독한 다음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신문에는 50퍼센트의 잘못된 희망과 47퍼센트의 잘못된 예언, 그리고 3퍼센트의 진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리히텐베르크]의 이 통계가 얼마나 정확한가하는 것을 가지고 논란할 필요는 없다. 다만 선진국이라고 뻐기는 구미 각국에서도 신문의 진실성이란 것이 늘 말썽거리가 되어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주기를 바란다.
요즈음의 일만 보더라도, 독일에서는 [슈피겔]사건이 있었고, 불란서에서는 [드·골]에의 불경죄로 신문이 고소를 당하는 일이 생겨나고 있다. "신문없는 정부보다는 차라리 정부없는 신문을 택하겠다"고 말하여 언론자유의 신처럼 된 [제퍼슨]대통령도 그의 재직시에 신문을 고소한 것이 무려 대여섯번이 넘는다.
그러나 신문에도 잘못은 많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의 경우, 대부분의 불신은 현실 그 자체에 있다. 나라 살림 맡은 분들의 이야기가 일관성이 없고, 모든 정책이 갈짓자걸음을 한다. 그것을 그대로 보도하다보면 신문만 거짓말을 하는 결과가 된다. 연탄값만 보더라도 그것을 올린다고 하는 박상공의 이야기와, 또 그것을 부결시켜버렸다는 경제각의의 소식이 분초를 사이에 두고 [랑데부]를 하고있는 것이 한국의 신문이다. 사소한 사건하나만을 보더라도, 아침 기사와 저녁 기사가 다르다. 양구나 남산사건의 경우-괴한이 간첩으로, 간첩이 다시 탈주병이나 무장강도, 그러다가 또 소리소문 없이 보도는 끊기어 버린다.
언론인 [테러]범은 그면에 있어서 극치다. 거의 진범임이 확실하다고 말했다가 불과 수시간 후에 번복되는가하면, 잡는다, 못 잡는다, 수사본부를 해체한다, 다시 결속한다, [알리바이]가 있다, 없다 이루 종잡을 수가 없다. 더구나 하루에도 열두번씩 붙었다 떨어졌다하는 정당의 분규를 보도하다보면 활자가 [트위스트]를 추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신문을 곧이곧대로 믿다가는 신경쇠약에 걸리기에 알맞다.
IPI 아주[세미나]가 서울에서 개막되었다. 신문의 자세나 책임문제가 또 약방의 감초처럼 논의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신문을 바르게 고치려면 정치나 사회현상부터 정상화되어야할 것 같다. 신문에는 [3%의 진실]밖에 없다는 비웃음을 비단 신문이 혼자서 걸머질 십자가는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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