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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1000년 만의 빛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99호 04면

“이 색깔하고 무늬 좀 보세요. 살짝 말아올린 기린 꼬리도요. 안쪽 마무리도 다른 청자는 그냥 둥글게 구멍을 내는데 이건 꽃모양으로 팠잖아요? 이 정도면 정말 최상품 고려청자입니다.”

‘기린형 향로 뚜껑’을 보여주던 학예사의 손이 가늘게 떨렸습니다. 11월 28일 고궁박물관에서 열린 ‘진도 오류리 해역 수중발굴조사 발표’ 기자회견 자리였습니다. 문화재 도굴단을 검거하면서 시작된 발굴. 이제 1% 정도만 마쳤다니 앞으로 어떤 보물이 얼마나 나올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날 공개된 수십 점의 고려청자는 막 세수를 마친 아기 얼굴 같았습니다. 맑은 비색(翡色)이란 바로 이런 색이었습니다. 12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니 거의 1000년 동안 펄 속에 묻혀 있던 것들입니다.

발굴 현장이 울돌목 근처라는 설명을 들으며 많은 상념이 스쳐갔습니다. 명량(鳴梁)이라 불리는 울돌목은 물살이 거칠기로 유명한 뱃길입니다. 바닷물이 암초에 부딪쳐 나는 소리가 돌이 우는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죠. 지나기 어려웠던 만큼 침몰선도 많았을 테고, 대신 여태껏 도굴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아차 하는 순간 불귀의 객이 된 뱃사람의 안타까운 사연이 있는가 하면, 여기서 대승을 거둔 이순신 장군도 계시죠.

나라 빼앗기고 동족끼리 싸우느라 가보도 간수하지 못한 못난 후손들에게 1000년 만에 얼굴을 보여주니 청자가 펄 속에 묻혀 있던 것이 다행이었다는 생각도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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