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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돌 한글날-그 어제와 오늘을 더듬어 본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학예> 서울 신문로 1가58번지「한글학회」­일제의 독재와 싸우며 우리말을 키워온 이「한글의 요람」은 오늘 5백19돌「한글날」을 맞는 가장 영광스러운 날에 쓸쓸히 지난날만 되새기고 있다. 이름만 재단법인인「한글집」의 총재산 목조 주택 건물, 여염집 속에 10평 남짓한 허술한 방 하나. 작년에 30만원, 금년에 1백만원을 문교부로부터 보조받았고 자체 내에서 연 40만원정도를 조달할 뿐「한글의 총본산」인「한글학회」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연구비 및 출판 비의 부족에 허덕이고 있다.
「한글학회」는 192l년「한선어연구회」라는 이름으로 발족했으나 16명의 발기자 중에서 장지영, 김윤경, 최두선, 이병기 네분만 아직 생존해 있다. 처음엔 월례 연구발표회와「한글」지 발간 등 사업을 하는 한편,「조선어 사전」편찬에 착수했다. 사전 편찬의 자료로서 「한글맞춤법 통일안」「외래어 표기법」「표준말 모음」등의 책이 발간되었다. 1942년 큰 사전 제1권의 원고가 완성되어 박문 출판사에 넘겨졌다. 바로 이해 10월 유명한 조선어 학회 사건이 일어났다.
해방이 되자「한글학회」는 태산같은 할 일이 밀렸다. 우선 국어 교본부터 만들어 내야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한 결과 해방되던 12월까지 각급 교과서를 완성시켰다.
「조선어학회」사건 때 증거물로 압수된 채 행방을 알 수 없던「큰사전」원고가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되었을 때는 너무 기뻐서 모두들 목을 놓아 울었다고 말한다.「록펠러」재단의 원조로「큰 산전」의 1·2·3권이 6·25전에 출간되었다.
그러나 나라를 찾은 뒤에도「한글학회」의 사업은 순탄치 못했다.
이승만 박사는 1948년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맞춤법이 괴이하니 고치라」고 문교부장관이던 안호상 박사에게 명했다.
안 박사는 그 명령을 이행치 않았다. 역대 문교부장관이 맞춤법 간소화의 압력이 끄덕 지게 가해져 왔다. 1953년 국어 심의회를 조직, 간소화를 강행하려다가 악명 높던「한글간소화파동」이 일어났다.
옛날에 나온 성경책의 철자법을 써야한다는 독재자의 주장에 학계와 언론계는 맹렬히 반대했다. 정부 당국은 반대의 선봉에 섰다.「한글학회」를 사갈시하여 회원을「빨갱이」로 몰기도 하고, 한 방송에 급습해서 가택수색을 하는 등 갖가지 수단으로 압력을 가했다.「록펠러」재단「운크라」「유네스코」등에서「한글학회」에 재정원조를 제안한 것도 정부가 자진해서 외무부를 통해 거절했다. 졸렬하기 작이 없는 보복행위다.
그러나 순교자처럼 한글을 지켜온 이들의 의지는 굽히지 않았다. 이 박사는 드디어 자신의 고집을 꺾고 1955년 9월 맞춤법에 대해서 간섭하지 않겠다는 특별담화를 발표함으로써 3년에 걸친「한글파동」을 끝을 맺었다.
「한글학회」는 중단했던「록펠러」재단의 원조를 다시 받아 1956년 한글날에「큰사전」 여섯 권을 완성시켜 세상에 내놓았다. 실로 28년만에 성취시킨 큰 사업이었다. 그러나「큰 사전」이 기념비적인 업적인 것은 사실이나 점점 문헌으로서의 가치 밖에 없고 쓸모가 없어지자「한글학회」는 요즘 대폭적인 수정, 보완을 계획하고 있다.
제2의「큰사전」이라 할 이 계획을 세우고도 최근엔 외국재단의 원조가 끊어져 대규모의 연구사업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이들은 아쉬워했다. 오직 문교부의 연구 보조비로 지명조사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서울 지명의 조사가 끝나는 대로 곧 책이 나올 것이라 한다.
이밖에도 방언 연구, 우리고전의 번역 등 큰 사업엔 전혀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외국에서 돈을 안주면 연구를 계속 할 수 없는게 오늘날「한글」의 현실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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