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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권 저층 아파트의 굴욕

조인스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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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은기자] "1982 4월 생, 올해로 31. 제 나이입니다. 저는 남 부럽지 않은 20대를 보냈습니다.

제가 한창 잘 나갈 때 사람들은 '개포동'(개도 포니를 몰고다니는 동네),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늙고 병들어 쓸모없어진 짐짝 취급을 하네요. 제 전성기는 다시 돌아올까요? 제 이름은 개포주공아파트 입니다."'아파트 투자 1번지'로 꼽히던 강남권 저층 재건축 아파트가 날개없이 추락하고 있습니다. 올 들어 최고 23%나 값이 빠졌다고 하는데요.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에 입주한 강남권 주공아파트는 개포 5~7단지, 잠실 5단지, 둔촌 3~4단지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5층짜리 저층아파트입니다. 때문에 가구수가 적은 반면 대지지분이 많아 무상으로 받을 수 있는 면적이 그만큼 많았습니다.

재건축 사업 초기 강남권 일부 아파트에선 10평형대 아파트 보유자가 30평형대 새 아파트에 공짜로 입주하는 집주인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아파트 한 채 잘 구입해서 돈 방석에 앉은 셈이었습니다.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대표적인 서민 아파트였던 강남권 주공아파트들이 재건축 연한이 도래하는 2000년대 들어 가격이 급등한 이유입니다.

2000년대 중후반까지 집값 '쾌속질주'…규제에 시련 시작

당시 개포주공, 고덕주공, 잠실주공 등 강남권 아파트들의 안전진단(아파트 재건축의 첫 단계로 안전도를 따져 위험하다고 판단될 경우 사업 진행)이 속속 통과되면서 재건축 사업의 신호탄이 강남 곳곳에서 터져나왔습니다.

그러자 시세차익을 노리고 집을 사려는 투자자들이 크게 늘었습니다. 본격적인 부동산 광풍이 불어닥치기 시작한 것이죠.

그런데 2006년 이후 본격적인 재건축 아파트의 시련이 시작됩니다. 집값이 급등하면서 정부가 집값 잡기에 나섰기 때문입니다. 대출을 규제하고 시세 차익을 환수해가는 장치인 강남3구 투기지역, 투기과열지구 지정, 재건축 초과 이익 환수제 도입 등 온갖 규제가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서울시도 동참합니다. 아파트를 지을 때 전체 가구수의 일정 비율(20%)을 전용 60㎡형 이하인 소형으로 지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중층 재건축 단지에 큰 타격을 줬습니다. 아파트를 지을 땅이 부족해 일반분양 가구수가 많지 않은 데다 계획됐던 대형 아파트를 소형으로 쪼개면 수익성 악화가 우려됐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사이 저층 재건축 아파트의 희소가치는 더 올랐습니다. 기존 주택이 대부분 전용 60㎡형 이하로 구성된 단지가 많아 중층 단지보다 수익성에 타격이 덜 할 것으로 보이면서 투자자들이 저층 아파트로 집중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올 들어 분위기가 확 바뀝니다. 기존 아파트값 폭락장에도 큰 폭의 하락 없이 버텨왔던 강남권 재건축 아파트들의 가격 폭락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개포동 D공인 관계자는 "정상적인 수요공급 곡선이 아니라 시세차익을 목적으로 집을 사는 부동산 광풍이 불면서 집값이 비정상적으로 올랐고, 이제 시장이 한계에 이르자 거품이 붕괴되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조인스랜드부동산 조사에 따르면 5층 이하 저층 아파트는 올 들어 12.25%나 집값이 빠졌습니다. 이는 지난해(-7.31%)보다 약 두배에 달하는 수치입니다.

저층 단지 가운데 매매가 하락률이 가장 큰 아파트는 강동구 상일동 고덕주공7단지 전용 65㎡형으로 11개월만에 무려 23.3%나 하락했습니다. 올 초 66500만원이었던 매매가는 현재 51000만원으로 주저 앉은 상태입니다.두번째로 높은 하락률을 보인 단지는 강남구 개포시영 전용 51㎡형으로 같은 기간 동안 21.7% 내리면서 61000만원에 시세가 형성됐습니다.

특히 주목할만한 점은 하락률 상위 10위권에 오른 10개 아파트 가운데 8개가 모두 강남 개포지구와 강동 고덕지구 재건축 아파트라는 점입니다.

10위권 내에는 고덕주공2단지 전용 39㎡형(-19%, 4), 고덕주공3단지 전용 50㎡형(-18.3%, 7), 같은 단지 전용 48㎡형(-18.4%, 8) 등이 이름을 올렸습니다.

반면 중층(12~15) 단지들의 하락 폭(-7.62%)은 저층 아파트에 비해 덜한 편입니다.

중층 아파트가 저층 아파트보다 값이 덜 내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의도 A공인 관계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층 아파트는 중층 아파트보다 투자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하락폭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저층 아파트는 대지지분이 많아 새 아파트를 받을 때 부담금이 적을 지 몰라도 실제로 사람이 들어가 살기에는 평수가 너무 작고 낡았다.

그런데 중층 아파트들은 20~60평형대로 투자 뿐만 아니라 실제 거주도 할 수 있다. 경기 침체, 사업부진 등은 저층, 중층 단지가 공통적으로 겪는 문제이지만 이 부분에서 차이를 보인다".

내년에도 하락세 이어질 듯

고덕동 A공인 관계자는 "값이 계속 떨어지면서 대출을 많이 끼고 집을 샀던 투자자들이 '무조건 팔아만 달라'며 집을 내놓는 경우가 늘고 있지만 투자자의 발길은 뚝 끊긴지 오래다"고 토로합니다.

중층 아파트들은 한강변 르네상스 사업에 따라 초고층 개발이 기대되면서 지난해까지 값이 급등했던 아파트들이 하락률 상위 10위권에 많이 올랐습니다. 10위권 내 7개 아파트가 모두 강남구 압구정동과 영등포구 여의도동 소재 아파트였습니다.

가장 많이 하락한 단지는 강남 개포동 현대3차 전용 165㎡형으로 올 초보다 21.4% 내렸습니다.

이 외에도 여의도동 시범 전용 119㎡형(-15.2%, 4), 압구정동 한양 7차 전용 137㎡형(-14.9%, 6), 여의도동 수정 전용 74㎡형(-14.8%, 8), 압구정동 현대3차 전용 82㎡형(-14.7%, 9) 등이 각각 상위에 랭크됐습니다.

전문가들은 ▷집값 단기 급등 ▷정책 불안 ▷집값 상승 기대감 실종 ▷재건축 사업 지연 등을 재건축 아파트 하락 원인으로 꼽고 있습니다.

개포동 B공인 관계자는 "강남투기지역 해제→소형아파트 의무비율 강화→사업성 악화→재건축 초과 이익 환수 유예 등 시장이 온탕과 냉탕을 오가면서 투자자들의 기대감이 꺾인 상태"라며 "앞으로는 착공 등 사업이 가시화되는 단지에만 투자가 살아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고덕7단지는 관리처분(새 아파트를 받는데 드는 추가 부담금 등을 산정하는)을 앞두고 시공사와 약속된 무상지분율(헌집의 대지지분을 기준으로 새 집을 공짜로 받을 수 있는 비율)을 두고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사업이 본격화하기까지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개포지구는 거래가 끊기면서 일주일에 500만원씩 값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압구정이나 여의도 한강변 아파트들은 추진위 단계에 머물러 있는 곳이 90% 이상일 정도로 재건축 사업이 더딥니다. 투자자들의 시선이 멀어지는 이유입니다.

여의도 C공인 관계자는 "저층 아파트는 전세가율(매매가 대비 전셋값 비율) 20% 안팎이지만 중층아파트는 60% 이상이어서 가격 폭락기에 브레이크 역할을 해준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당분간 이 같은 하락세는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대선을 앞두고 있어 새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 알 수 없는 데다, 대내외적인 경제 상황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서울 시장의 임기도 1년 가량 남아있어 시장에 불확실성이 여전하다며 투자자들은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내년에도 아파트 거래부진이 이어질 가능성이 커 아파트값이 큰 폭으로 오르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재건축에 투자할 때는 이미 착공에 들어간 단지 등에 선별 투자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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