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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시간 이어진 삼성 비판 … 이건희 회장은 흡족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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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디자인의 시대다. 그럼에도 디자인이 정말로 경영자원으로 기능하고 있는 예는 적다.’

 후쿠다 보고서 첫 문장이다. 보고서는 이어 “디자인이 경영자원이 되려면 디자인에 대한 통일된 인식과 이해가 필요하다. 그것은 경영 측과 디자인 측의 상호 노력과 이해로부터 시작된다”고 적고 있다.

 13쪽 분량의 후쿠다 보고서는 큰 표로 만들어져 있다. 왼쪽에는 경영진의 질문, 오른쪽에는 후쿠다의 설명이 이어진다. 보고서는 경영진의 디자인 불만에 대해선 “어떤 제품을 만들 것인지 말 것인지 기획 단계부터 상품 전체의 전략, 출시 시기, 마케팅 전략 등을 명확히 하고 이 정보가 (디자인 쪽과) 공유돼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조직 문화에 대한 비판도 있다. “세 개의 디자인 안을 내면 경영진은 세 개를 절충하자고 나온다”며 “절충안은 각 디자인의 핵심 포인트를 사라지게 만들지만 디자이너들은 그냥 따르는 경우가 많다”고 비판했다. 또 “책임 부서가 명확하지 않아 실패 노하우가 축적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도 담겼다.

 보고서는 1993년 6월 4일 이건희 회장에게 건네졌다. 이날은 일본 도쿄 오쿠라 호텔에서 이 회장 주재로 삼성전자 기술개발 대책회의가 열린 날. 삼성 임원진과 후쿠다 고문을 비롯한 10여 명이 모인 자리였다. 회의를 끝낸 이 회장은 일본 측 고문들만 따로 객실로 불렀다. 그러면서 이 회장은 “그동안 삼성전자에 대해 보고 듣고 느낀 점을 허심탄회하게 얘기해주세요”라며 말문을 연다. 후쿠다 고문은 그동안 느낀 점을 적은 보고서를 건넸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 자리는 삼성전자 성토장이 됐다”고 전했다. 오후 6시에 시작된 대화는 이튿날 오전 5시에 끝났다. 이 회장과 후쿠다가 밤을 새우면서 토론을 벌인 것이다.

 다음날 독일행 비행기 안에서 이 회장은 후쿠다 보고서를 수차례 정독했다. 이어 이 회장은 6월 7일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 호텔로 삼성 핵심 경영진 200명을 소집한다. 그리고 회장 취임 후 5년여간 강조해온 ‘질(質) 경영’의 실패를 질타하고 ‘신(新) 경영’을 선포한다.

 사흘 뒤인 6월 10일. 이건희 회장은 자신의 ‘질 경영’ 특강에 대한 사장단의 의견을 구했다. 이 자리에서 당시 이수빈 비서실장은 사장단이 공감하고 있던 내용을 직언했다. “아직까지는 양(量)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질과 양은 동전의 앞뒤입니다”. 순간 이 회장은 표정이 돌변하며 손에 들고 있던 티스푼을 테이블 위에 던진 뒤 문을 박차고 나가버린다. 이 사건은 삼성인들 사이에 ‘질·양 논쟁’ ‘프랑크푸르트 스푼 사건’으로 전해진다. 삼성 임직원들은 이 사건이 ‘질 경영’이 선언적 구호가 아닌 실천적 과제로 뿌리 내린 계기가 됐다고 평가한다.

박태희·이지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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