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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에 살고 지고…] (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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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마치 소림사 무술대회에 참가하는 천하의 협객들처럼 저마다 벼르고 담금질해온 글솜씨를 뽐내며 김동리.서정주로 대표되는 문단의 핵우산 아래 모여든 우리 서라벌예대 문창과 58학번들은 입학하자마자 등단의 문부터 두드리기 시작했다.

졸업을 전후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신춘문예며 문예지 추천을 통해서 모두들 얼굴을 내뵈는데 키가 껑충하고 촌티나는 경상도 청송 출신의 김주영은 좀처럼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대기만성이라던가,동료들보다 십년 늦게 '월간문학'신인상에 당선되어 서울로 올라오더니 이내 스타군단에 합류하고 서울신문에 연재소설 '객주'를 5년이나 끌어가는 괴력을 발휘했다. 그 입담과 필력을 얻기 위해서 기초공사기간이 길었던 모양이다. 대하소설'객주'는 연재가 끝나자마자 출판되어 서울의 종이값을 올렸고 덩달아 김주영은 대형작가가 되어 상한가를 쳤다.

뚝심과 끈기의 김주영은 '객주'를 넘어서는 글감을 찾더니 마침내 한국일보에 '화척'을 들고 나왔다. 잘나간다 싶었는데 1989년 10월 하순 무렵 느닷없이 '김주영 절필선언' 기사가 터졌다.

그 무렵 김주영과 나는 뻔질나게 뭉쳐다니던 터라 영문도 모르는 나까지 까닭을 묻는 전화에 시달려야했다.무언가 심경의 변화와 함께 글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때 부닥치는 작가적 고뇌에서 나온 일시적 해프닝이거니 생각할 뿐이었다.

그 '절필'이 한창 화제가 되고 있을 때 우리 가까운 친구들은 이미 짜놓았던 가을여행을 떠난 것이다. 황동규.김주영.김원일.정진규.김종해.정규웅.이만익.정현기.김선학 등과 거기에 내가 끼어 우리는 봄.가을로 1박2일 혹은 2박3일로 산천경개를 구경하는 나들이를 하고 있었는데 바로 가을 여행을 앞두고 그 '절필'이 터진 것이다.

그래서 '절필여행'으로 이름이 붙게 되었고 우리들은 마음 속으로 "지가 어떻게 소설을 안써?"하면서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주영이를 속으로 토닥거리며 속인들은 발을 들여놓지 못한다는 문경 봉암사에 가서 발목까지 빠지는 낙엽을 밟고 있었다.

글쟁이들치고 역마살이 안 낀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김주영은 '객주'를 쓰면서 팔도강산의 장터거리를 모두 뒤졌고 더러 외국여행이라도 할라치면 난장을 꼭 보아야겠다고 성화이다. 여기서 역마살의 원조를 놓칠 수 없는데 시인 황동규형이다.

나는 그를 고산자 김정호의 이름을 따서 아예 '황정호'라 부르기도 하는데 처음 만나는 후배 시인에게 고향을 묻고는 그 곳 태생도 모르는 문화지도를 가르쳐준다. 글감사냥은 책상 앞에서 하는 것이 아니고 발톱이 닳도록 걷고 또 걷는 일임을 나는 황동규.김주영에게서 배웠다.

그렇게 우리 나들이 동아리는 선운사로 동백꽃도 보러 가고 주왕산 단풍도 보러 가고 동해에 고기도 낚으러 갔었다. 늦가을 절필여행이 있은 다음 해 여름 8월 한가운데에 나는 김주영이 운전하는 옆에 앉아 노닥거리며 동해안에 가서 이틀간 함께 있다가 헤어져 돌아왔다. 올라와 보니 김주영이 '집필여행'을 떠났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려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하면서도 참 묘한 인연도 다 있다.

김주영의 절필여행도 함께 가더니 집필여행까지?하고 그가 다시 선보일 다음 작품을 머리 속에 그려보았었다.

김주영은 다시 붓을 들어 소설 '화척'을 마무리했고 1995년 8월 인사동 선천집에서 그 완간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김주영은 방에 들어서더니 오다가 즉흥시를 한 편 썼노라고 읊어댔다.

제목은 '인사동 산책'이라나. "그 여자 젖꼭지 한번/참 토실토실하다"고. 그때 황동규형이 한 수 거들었다.'토실토실하다'는 빼! 소설가와 시인의 불꽃이 '화척'에서 한번 번쩍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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