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신준봉의 시시각각

소설가 오정희를 위한 변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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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신준봉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신준봉 문화디렉터

신준봉 문화디렉터

누구에게라도 달갑지 않은 한 달 전의 사건이지만 그래도 복기하고 싶다. 한 문인이 과오에 비해 지나친 시련을 겪게 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난달 서울국제도서전(6월 14~18일) 기간에, 문제를 제기한 문화연대 등의 섬뜩한 표현을 빌리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국가범죄 실행자” “부끄러움을 모르는 문학”으로 지목된 소설가 오정희(76)씨 이야기다.

블랙리스트 작동 때 문예위 위원
그 이유로 ‘국가범죄 실행자’ 매도
혐오 부추겨서는 사회 진전 없어

도서전 전까지 오씨는 문학 거목이라는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은 작가였다. 과작(寡作)이었지만 ‘중국인 거리’ ‘불의 강’ 같은 강렬한 단편들로 일찌감치 평단과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오씨 작품을 필사하거나 읽으며 작가의 꿈을 키웠노라는 후배 여성 작가가 여럿 있는 ‘작가들의 작가’였다. 과작이, 작품을 함부로 발표하지 않겠다는 결벽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오씨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맞물려 2016~2017년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에 연루됐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았고, 그래서 사소하게 느껴졌다.

도서전을 주최하는 대한출판문화협회가 5월 중순 공개한 포스터 속의 도서전 홍보대사 오씨는 오라(aura)마저 풍겼다. 도서전 첫날인 지난달 14일 사진 한 장이 상황을 반전시켰다. 출판계에 따르면 이날 도서전 행사장인 서울 봉은사로 코엑스 바깥에서 오씨를 ‘성토’하는 기자회견을 하던 문화연대 등의 회원들이 행사장에 진입했다. 마침 개막식 참석을 위해 김건희 여사가 도착한 순간이었다. 이후 상황은 사진이 말해 준다. 대통령실은 경호 프로토콜에 따라 시위자를 끌어낸다. 정장 차림들의 거센 완력, 격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외치는 시위자, ‘우리는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는 문구가 인쇄된 구겨진 플래카드…. 이들의 주장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어쩐지 과거 ‘진압의 기억’을 자극하는 이미지다.

결국 오씨는 홍보대사에서 물러났고, 출협은 사과했다. 2023년 도서전은 코로나로부터 회복과 함께 블랙리스트 논란으로 기억되게 됐다. 오씨나 문학계에는 몇몇 젊은 문인들이 문화연대 등의 주장에 동의해 도서전 참가를 보이콧했다는 점이 특히 아팠을 것 같다.

누구라도 블랙리스트의 해악을 어렵지 않게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간단히 작가를 양심의 존재라 하자. 그가 집필을 위해 마주하는 건 과거에는 백지, 요즘은 PC겠지만 실제로 대면하는 건 자신의 양심이다. 어떤 계산이나 억압 없이 작가는 자신이 믿는 바를 쓴다. 수시로 양심이 흐려지는 독자들은 그래서 작가의 글을 좋아한다. 그런 작가가 양심에 반해 동료 작가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에 어떤 식으로든 연루 또는 가담했다면 비난을 피해갈 수는 없다.

문제는 문화연대 등이 문제 삼은 오씨의 혐의가 과장됐다는 점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2019년 공개한 블랙리스트 백서 4권에는 2015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지원 대상 선정 과정에서 심사위원들이 ‘찍힌’ 작가들을 지원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자 문예위 문학분과 위원이었던 오씨가 나서서 심사의원들을 설득한 거로 돼 있다(122, 123쪽). 한데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하응백 문학평론가는 12일 기자에게 “오씨로부터 어떤 설득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백서의 오류 아닌가? 오씨가 2017년 하반기 5개월간 문화예술위원장 직무대행을 떠맡아 블랙리스트 도장을 쾅쾅 찍어줬다는 문제 제기도 터무니없다. 오씨는 당시 비상근 위원장이었고, 무엇보다 2017년 상반기 이 나라는 블랙리스트 주범 색출에 온통 매달려 있었다. 블랙리스트가 작동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 보수 성향 문학평론가는 이런 해석을 들려줬다.

“한 사람을 악마화해 혐오를 부추기는 방식으론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번 오정희 작가에 대한 문제 제기는 현 정부의 문화예술 정책에 대한 비판이라고 본다.” 오정희 비판이 다분히 정치적이라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