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3401)<제77화>사각의 혈투 60년(19)|풍운아 이용식|김영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1930년대에 링계를 주름잡은 가장 성공적인 프로복서로는 서정권을 비롯, 이용식 현해남 박용진 등이 꼽힌다.
이 중 이용식이 가장 선배다. 그러니까 이용식은 일반적으로 한국인 최초의 프로복서라고 불리는 김정연(소림신부)과 사실은 1928년 같은 해에 데뷔했다.
그러나 김정연은 그 무대가 동경이었고, 이용식은 중국의 상해였다.
따라서 세상에 알려진 순서대로라면 이용식은 김정연에 이은 두번째 한인 프로복서라 하겠다.
그렇지만 김정연이 불운의 요절을 한 반면, 이용식은 한 시대를 풍미한 풍운아였다.
비록「조선인」이었지만 일본에서 이용식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는 일본 프로 복싱사에서 『가공할 펀치력의 소유자에다 불후의 명승부를 창조하는 대스타』라고 평가되고 있다.
그의 링네임은 식촌용랑. 그리고 별명이「청룡도」였다. 이 시대에『청룡도「우에무라」』가 나타나는 곳엔 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의 통쾌 무비한 KO펀치를 즐기기 위해서였다.
하필 청룡도라는 별명이 붙은 것은 괴력의 주먹을 휘두르는 폼이 천하명장 관우장의 거대한 창검이 춤추는 모습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좌우 가릴 것 없이『휙!』하고 바람을 일으키는 그의 노도 같은 스윙의 파괴력 앞엔 장사가 따로 없었다.
이용식은 원산 태생이다. 그러니까 원산은 김정연 황을수 이용식 등 초기에 유명 권투선수를 가장 많이 배출한 고장이었다.
1908년생인 이용식은 불과 13살 때 원산항에 입항한 스탠더드 석유회사의 유조선에 잠입, 미국 뉴욕으로의 밀항을 기도했다.
그러나 항해도중 발각돼 상해에서 배를 내렸다. 대담하고 똘똘한 이용식은 음식점종업원 등 온갖 잡일을 하면서도 이 광대한 국제도시에서 고학으로 학교(보석학원) 를 3년간 다녔다.
그러다 손일선 혁명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 받아 광동 군인학교에 입학, 갓 스물의 나이로 비행기 조종술을 배워 파일럿으로 전선에 출동하기도 했으며 21살 때 조선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수배를 받자 상해를 탈출, 만주 노서아를 전전하다 30년 10월께 동경의 링계에 등장했다.
이용식은 이미 상해에 있을 때 링에 올랐다. 「영·앰비션」이라는 서양식 링네임으로 28년에 데뷔, 국적불명의「돈·새크러먼트」「보비·랜드」등을 KO로 눌러 이겼다.
그가 권투를 어떻게 배웠는지, 천부적인 철권이었는지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추측컨대 후자인 것 같다. 혈혈단신으로 돈을 벌기 위해 천혜의 자산인 주먹을 믿고 링에 뛰어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프로복서로서 출세한 이후에도 이용식의 권투스타일은 사실 마구잡이 싸우는 식의 스윙 일변도였으니 기초훈련이 없었던 모양이다.
이용식은 동경으로 간 후에야 제국권투구락부에 입문, 본격적인 트레이닝을 받았다.
31년 정월 일본 데뷔전(6라운드 경기) 에서 원정에게 판정패했으나 2개월 후 KO로 간단히 설욕, 이후 그의 가공할 KO퍼레이드는 약 1년 동안 10연속 KO승의 파죽지세로 당시로선 전례 드문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용식의 해머스윙에 나가떨어진 상대는 전쟁 전 일본최강의 복서라는 중촌금웅 굴구항남 등 유명선수를 총망라한다. 이용식은 33년에 서울로 와「올림픽 권투회」를 창립, 후배양성을 꾀하다가 종전 무렵 북경으로 간 이후 소식이 끊겼다.
한편 현해남(본명 현방역) 은 36년 밴텀급 전 일본 챔피언이 된 후 미국에 원정, 페더급 세계60위(99명중) 에 랭크되었고 37년 귀국하여 당시 일본의 권웅이라던 굴구항남을 제압, 최초의 2개 체급 챔피언이 된 테크닉의 화신이었다. 제주도 출신으로 현재 일본에 살고있다.
같은 페더급으로 역시 용맹을 떨쳤던 박용진도 현해남과 비슷한 스타일. 워낙 테크닉이 좋고 빨라 권투의 천재 혹은 신이라고까지 불렸을 정도였다. 그는 6·25때 서울 안암동 집에서 외출했다가 행방불명 됐다.
박용진과 함께 34년 전일본 밴텀급 아마선수권자였던 김창엽도 특기할만한 선수. 그는 한국 최초의 사우드포(왼손잡이) 였다.
조선권투구락부의 링 위에서 결혼,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