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농지약탈
> 『단적인 예를 하나만 들까요. 저들이 설립한 동양척식회사가 19l0년 합방당시 갖고있던 땅이 1만 정보 남짓했어요. 그게 소위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이듬해인 1919년에는 7만
-
(25)「반민시위」(5)
반민 법 시행을 위해 국회는 9월 하순「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각 도에서 1명씩 10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는 의원장 김상덕, 부위원장, 김상구 의원으로 진용을 짰다.
-
제74화 한미 외교 요람기(83) 한표욱
제3차 한일회담에서「구보다」가 그런 망언을 한 우리측 홍진기 대표와의 논쟁의 시말은 일본 아사히신문에 의해 상세히 보도됐다. 당시 홍 대표와「구보다」간에 벌인 논쟁을 회의 의사록(
-
|한미외교요람기(8)|한표욱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4조A,B항에 대한 미국무성의 유권해석을 보고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을 몹시 언짢게 생각했다. 제1차 한일회담은 청구권문제로 의견이 엇갈려 52년4월21일
-
상사의「쿠데타」
면적은 한반도의 절반, 인구는 강원도 정도인 1백80여만명. 군대는 육군이 5천명, 해군이 1백50명 공군이 20명으로 총 병력 5천l백70명. 이것은 숫자로 본「리베리아」공화국의
-
문학작품에 비친 3·1운동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시인으로서의 자기소명에 철한 이 구절은 순절의 시인 육사의『광야』에서 따온 것이다. 일제 암흑기에 쓰여진 이 땅의 모든 시는 그대로 가난한
-
한나라속에 두 개의 정부 「팔레비」없는 「이란」은 어디로…
「이란」반정부세력을 이끌고 있는 회교지도자「호메이니」의 정치관과 그가 주장하는 「이슬람」공화국의 실체가 어떤것인지 아직정확하지 않다. 서독의 시사주간지 「슈피겐」은 「호메이니」와
-
기미년
「양의 해」에 거는 기대는 한결같다. 평화와 안정. 주부도, 가장도 그 마음엔 다름이 없다. 십이간지의 터울을 놓고보면 역사의 변환은 어지럽기만하다. 수많은 조약이 잇달아도 나라
-
(33) 그 전설·실존·도명을 밝힌다|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조작된 광복회 10대 강령
1925년 1월 소·일간에 수교조약이 체결되고 그 조약 속에 양국의 치안을 해치는 행동을 서로 금지한다는 규정마저 있어서 소련의 지원을 얻어 조국의 독립을 쟁취코자 했던 한인혁명가
-
「사할린」생존교포 1천25명
「사할린」교포에 관한 소식은 한국 국민들에게는 항상 묵은 상처를 건드리는 아픔을 준다. 이역만리에서 멀쩡하게 30년의 공백기간을 강요당한 이들이 자유를 되찾고, 조국의 품에 안기기
-
(20)|제5화 북해도 한인 위령탑의 엘레지 (1)|제2장 피맺힌 사연들의 흔적
일본 본주의 최북단 「야쓰노헤」 (청삼현팔호시)를 떠난 국내선 여객기는 단숨에 「쓰가루」 (진경) 해협을 건네 뛰고 한시간만에 「삽보로」 (찰황) 구주 공항에 내려앉았다. 5월
-
대동아 공영권적 구상
일·중공의 수교는 국제정치사에 있어서 신기원을 극하는 것이다. 이 두개 「아시아」의 거인국은 2차대전후 지금까지 전쟁 상태에 놓여있었고 서로들 상대를 보기를 가장 위험한 가장 적국
-
민족사와 세계사|전국역사학대회 강연에서
제15회 전국역사학대회가 26일 숙명여대에서 열렸다. 한국서양사학회·역사학회·한국사학회·동양사학회·역사교육연구회·한국경제사학회·한국미술사학회가 공동 주최한 이날 대회에서 조의설 대
-
(448)제26화 경무대 사계(75)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발효하게됨에 따라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의 대부분이 철수를 시작했다. 이 대통령은 이런 상황에 대비하여 미국을 방위조약으로 묶어놓고 동북아군사동맹을 만들어
-
가난뱅이 농부 아들로 태어나 험구와 직선정치로 세계를 주름 잡았던 기재 공존을 심고 간 해빙 첫 주자 「흐루시초프」
23세대 글 배운 무학|회고록으로 물의도|둔한 표정이 경쟁자 싫은 스탈린 신임사 대전 후 복구 사업에 솜씨 보여 크게 승진 그 자신이 입버릇처럼 말했듯이 「흐루시초프」는 『산골의
-
"미의「국제주의」가 비판받을 때는 왔다"
미국은 세계 무대에 지나치게 깊숙이 발을 들여놨다. 특히 군사적으로 내디딘 발목은 뽑을 수도 없을 만큼 깊이 박혔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같은 과잉개입의 외교정책을 수행함에 있어
-
③신문주간에 돌아본 「자주」수호의 기수들
우리나라 신문의 초창기가 바로 국가운명이 풍전등화 같았던 때이었고, 경술년8월, 나라가 망할때까지 남아있었던 몇몇 신문이 국가와 운명을 같이한 결과 그 후 10년간 이 사회에서언론
-
민족의 횃불|일본식민주의와 3·1운동|빈사상태서 사슬 끊고 궐기
올해는 3·1운동 50주년을 맞는 해다. 반세기 전 한민족은 거국적으로 일제의 탄압에 항거, 우리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어섰다. 이 투쟁은 우리 민족사에 길이 빛날 교훈을
-
한국사의 시대 구분
역사를 전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할 때 시대구분 보다 중요한 문제는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 역사의 서술은 편의적인 구분의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국사학계의 자기 비판이다
-
「시일야방성대곡」-고 장지연 선생 묘비 제막에 붙여
지금으로부터 62년전-1905년 노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이 그 여세를 몰아 군대의 힘으로 우리정부를 강압하여 소위 을사보호조약(을사보호조약)을 체결케 했던 그해11월
-
민중당 기조 연설 요지
우리 민중당은 이 나라의 미래상으로서 다음의 3대 목표를 실정코자한다. 1, 공포와 빈곤으로부터 해방된 민주 사회를 건설하자. 2, 모든 국민에게 삶을 보강하는 대중 경제 체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