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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횃불|일본식민주의와 3·1운동|빈사상태서 사슬 끊고 궐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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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올해는 3·1운동 50주년을 맞는 해다. 반세기 전 한민족은 거국적으로 일제의 탄압에 항거, 우리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어섰다. 이 투쟁은 우리 민족사에 길이 빛날 교훈을 남겼다. 본보는 앞으로 8회에 걸쳐 3·1운동을 총체적으로 분석 평가, 연재한다.
1919년 3월1일에 우리 민족이 저 극악무도했던 군국주의 일제의 식민통치를 박차고 독립을 선언한 다음 거족적인 시위운동을 전개하여 전세계를 놀라게 한지도 이미 만50년을 경과하게되었다. 해마다 이날이 되면 우리 겨레로서 누구나 그때의 역사를 되새겨보지 않을 사람이 있으리 오마는 꼭 반세기를 넘기게 된다는 점에서 올해 이날의 느낌은 더욱 간절한 바가 많게 된다

<불혹의 신념 조국애>
한 인간의 생애에서도 40이면「불혹」하고 50이면「지천명」이라고 하였으니 우리국민 전체로 보아서도 이제는 내 조국에 대하여「불혹」의 신념과 긍지를 가지고「천명」이 무엇인가를 깨달아서 정녕 태산부동의 기본자세로 밝고 바른 천하의 대도를 건너갈 해가 아니겠는가.
이러한 느낌에서 새삼 옷깃을 여미고 그 역사를 되새겨 우리의 앞길과 앞날을 바라보고자 한다.
기미년 2월8일에 일제의 수도 동경 한복판에서는 우리 유학생들의 비밀결사인「조선청년독립단」이 독립선언서를 반포하고 3월1일에는 서울 한복판에서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또한 독립선언서를 반포한 다음 거족적인 엄청난 시위운동을 전개하여 전 세계를 놀라게 하자 망지소조한 당시의 일제총독부는 이 운동이 일어난 요인을 지적하고 선전하되『총독정치의 선정을 잘 체험 못하고 이해도 못하는 일부의「불평분자」와 젊은 학생층의「부령도배」가 이 당시에 널리 알려진 미국대통령「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자극을 받고 또 선동되어 일으킨 한때의「소요사건」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세계의 이목과 여론을 흐리게 하고자 발버둥쳤다. 이러한 그들의 선전이 어느 정도의 효과를 거두기도 하였던지 오늘에는 국내외의 일부인사들 입에서도 걸핏하면 저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를 최대의 요인이었던 것처럼 내세우는 수작이 가시지 않고 있다.

<근대화 이용한 기만>
그러나 이러한 수작은 결국 그토록 흉악하고 무도했던 일제의 총독부가 스스로 지은 천인공노의 죄악을 은폐하고 남에게만 전가하기 위하여 살인강도의 엉뚱한 자기변명처럼 내세운 것임에 불과하다. 양의 가죽을 쓴 이리의 수작을 뉘라서 곧이 들을 것이냐. <첫째> 19세기의 중섭부터 그들은 우리보다 근대 서구문명을 한걸음 앞서서 수입하고 모방할 수가 있었다고 해서 그들만이 잘 살기 위하여 우리나라를 희생의 대상으로 삼았다. 여기에 그들은 서구에서 배운 기술로 재빨리 무기와 군사시설부터 근대화시키고 이 또한 서구에서 수입한 「매키어벨리즘」을 고도로 이용하여 우리를 속이고 우리를 침략하기에 온갖 술책을 다 기울였다.

<병자조약부터 마각>

<둘째>이같이 하여 그들은 근대무기인 군함과 대포로 우리를 위협하고 1876년(병자)에 수호조약을 체결하되「자주」「평등」을 팔고 실상인 즉 치욕의 불평등한 조약을 뒤집어씌운 것이었다. 나아가 그들은 엄청난 상업자본의 공세 아래 이 나라를 통틀어서 저희 상품 시장화 하고 경제침략을 감행하면서도 이것이 문명이고 개화라고 우겨대기도 하였다.
그들의 국제적「라이벌」인 청제국을 이 나라에서 축출하고 전승을 자랑하며 1895년에「마관조약」을 체결할 때만해도 그들은 이 나라의「완전자주독립」을 보장한다고 떠들어대며 뽐내기도 하였다.

<세째>그러나 다음에 등장한 제2의「라이벌」인「러시아」제국마저 이 땅에서 축출하게되자 그들은 스스로 양의 가죽을 쓴 이리의 정체를 드러내며「보호」라는 미명 아래 이 나라의 주권과 그밖의 모든 권익을 침해하고 박탈하기 시작하였다.

<네째>그리하다가 저들의 정체를 뒤늦게나마 간파한 우리민족의 저항이 매우 치열해지니 일제는 마침내 30년 동안 걸쳐온 양가죽의 가장도 벗어치우고 새삼「동양의 항구평화」니, 이민족의 「안녕 질서」와「복리증진」이니, 혹은 저희 국민과 더불어「일시동인」이니 하는 구호 아래 이 나라를 완전히「병탄」하여 저희 식민지화하여 수욕의 달성을 자랑하였다.

<다섯째>그러나 일제의 이리 같은 야욕에는 추호의 양심도 신의도 없는지라, 그들은 세계사에 유례 없는「헌병경찰제도」를 지독하게 활용하여 우리민족을 상대로 철저한 차별과 학대를 마음껏 하고「복리증진」대신에 무서운 수탈과 착취를 감행하였으며,「안녕 질서」를 팔고 우리민족의 고유한 문화와, 전통과 애국애족 하는 기본정신마저 말살하기 위하여 온갖 거구날조의 죄명아래 대거의 검거·투옥과 무자비한 살육까지 감행하였다. 이같이 하고서 어찌 천도가 무심하기만을 기대할 것이냐.

<불사조 같은 민족혼>
저들의 폭압 아래 생지옥 속에서 진실로 반사상태에 빠졌던 것이 우리민족이었다. 그러나 광명정대 하되 경인불굴의 남다른 정신과 용기를 간직해온 것이 우리민족이기도 하였기에 언제이고 기회만 있으면 그 쇠사슬을 끊고 불사조처럼 궐기할 수 있는 용의와 저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 정신과 그 힘을 기르고 간직하게 된 것은 결코 남에 의하여 하루 이틀에 된것이 아니요, 오랜 민족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가 기르고 간직해온 그것이었다. 그러니 만큼 기미 독립운동의 요인은 무엇보다도 일제의 극악무도한 죄과와, 이를 상대로 궐기하여 싸우게 된 우리민족의 위대한 저항 속에서 이를 찾아야한다.

<청년·학생들이 전위>
또 이 3·1운동은 청년학생들이 전위부대의 역할은 물론이요, 거족적인 동원의 중추적인 역할까지도 담당했었다.「민족대표」의 영광은 스승과 부형들에 발이 되어 전국 농촌의 부형과 형제자매를 총동원시켜 독립만세의 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일제의 총탄 앞에 먼저 가슴을 내대고 피 흘려 쓰러지는 것은 그들이었다. 그러했기에 그들이 전열에 쓰러지면 부형들이 그 뒤를 따랐고, 부형들이 쓰러지면 어린 제매도 다가들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진실로 이러한 젊은 지성과 용기가 근대무기로 완전무장한 일제의 총검 앞에 적수공권으로 맞서서 피 흘리고 쓰러질 수 있었기에 극악무도했던 일제도 비로소 당황하고 일제의 악선전에 속아왔던 세계의 지성과 이목도 비로소 놀라 우리민족의 존재와 그 숭고한 모습을 새삼 지켜보며 찬양하기도 서슴지 않았다.

<평화적 시위에 학살>
그러했기에 일제는 더욱 독이 올라서 무자비한 탄압과 야만적인 살육으로 우리에게 임했던 것이니 이 운동을 통하여 우리는 줄잡아서 다음과 같은 어마어마한 피해를 보았던 것이다. 즉 이해 3월 l일부터 5월말까지의 3개월 동안에 국내에서만 다음과 같은 희생을 내었던 것이다.
①각지방시위 운동의 집회 수 1,542회 ②이상에 동원된 인원수 2백2만3천여명 ③일제 손에 피살된 인원수 7,509명 ④일제 손에 부상당한 인원수 15,961명 ⑤일제 손에 피검된 인원수 46,948명 ⑥일제 손에 피소된 교회당 개47소 ⑦일제 손에 피소된 학교 2개소 ⑧일제 손에 피소된 민가 715호
여기에 필자는 새삼3·1운동의 전모에 대하여 보다 자세한 소개를 지면관계도 있으니 후일에 미루고 그 모습을 객관적으로 종합해본 외국사람들이 어떻게 언급하고 어떻게 평가하였던가 몇 가지만을 제시해볼까 한다.

<외국인도 용감 찬양>
영국의 대기자 「머켄지」는 그의 저서「자유를 위한 한국의 투쟁」서문 첫줄부터 대강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1919년 봄 일제에 항거하여 일어난 한국민족의 평화적인 시위는 바야흐로 전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세계정치가들에 의하여 이미 퇴보하고 열등한 민족이라고 낙인찍혔던 한국민족은 이제야말로 가장 드높은 질서아래 영웅적인 행동을 전개하고있다.』
그리고 구한말부터 우리나라와 깊은 인연을 맺어온「헐버트」박사는 우리들의 이 독립운동을 가리켜『놀랍고도 도덕적인 성격의 애국운동』이라고 전제하고 다시 다음과 같이 감탄해 마지않았다.『다른 민족의 노예로서 구차하게 생존한다고 함은 차라리 자유스러운 넋을 위하여 죽는 것만도 못한 것이라, 이러한 결심이 있음으로 해서 한국민족은 저러한 궐기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논평을 조용히 되새겨볼 때 우리들은 당시의 민족대표 33인이 비폭력의 저항을 주장하고 시위운동에 선두를 담당하며 피 흘리지 않았다고 해서 오늘에 결코 과소평가 할 수는 없다. 나아가 젊은 지성인들을 포함한 광의의 지식층 인사들이 주도한 것을 잊어버리고 동원된 민족 대중의 직업만이 대부분 농민이었다고 해서 그 운동의 주도세력이 농민이었다고 단정하는 것도 사실과 이론이 어긋난다고 믿는다.

<문화정치는 도금술>
한편 이와 같은 일이 있은 뒤 일제의 본국정부도 이제는 할 수 없이 총독과 총독부의 간부를 갈아치우고 정책면에 있어도 이른바 강유양면의 연막전술을 채택 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제2대 총독 장곡천은 해면 소환 당하고 그대신 저희 해군대장 재등 실이 제3대 총독으로 임명되어 새 간부를 이끌고 부임하게 되는 동시에「무단통치」대신「문화정치」라는 도금의 새간판을 높이 들게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그늘이 어찌 다음순간에 나타날 무서운 사실을 꿈엔들 얘기할 수가 있었을 것이냐.
위세도 등등하게 신임 총독 재등이 그의 아내와 더불어 서울로 부임하던 바로 그날, 9월2일에 그는 저희 관민다수의 영접을 받아가며 서울역을 나서던 순간 우리 민족의 연노한 강우규 의사가 내던지는 폭탄의 세례를 아니 받을 수가 없었다. 요행으로 그의 부부만은 약간의 거리가 빗나가서 한때 혼비백산 한채 겨우 목숨만은 살았으나 그 폭탄의 위력은 그를 영접하던 저희 관민 수10명을 사상시키고 맡았다.
이 소문이 좍 퍼지자 세계는 또다시 놀라고 군국일제의 거물들은 내심으로 전표 하였다. 특히 우리 한국을 병탄한 원흉들은 그 어느 곳에 있든지 좌불안석의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했기에 당시 대만총독으로 영전했던 저 명석 원이랑은 좀이 쑤시었던지 얼마 후에 급작스레 대만을 떠나서 동경으로 향하던 도중 10월20일에 급사하고 맡았으며, 그의 장례식날 (11월3일)에는 일찌기 그의 상관이자 초대 조선총독이던 전총리대신 사내정의 마저 급사하고 말았다.

<위대한 그 정신계승>
그러했기에 3·1운동이 터진 이래 이 광경 저 광경을 목도하고 취재하고 간 외인기자「다니엘·파이버」는 그 운동의 성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기도 하였다.
『일제가 한국을 어디까지나 손아귀에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 할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으나 이와 반대로 한국민족의 일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그 굳은 결심도 결코 일제의 그것만큼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일제는 장차 아무런 선정을 편다고 할지라도 과거의 실적에 비추어 한국민족을 통치할 능력이 전무한 것은 분명하다. 몹시도 혼란하게 된 이 세계에는 또다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였으니 곧 한국문제가 그것이다. 한국도 이제는 저「발칸」반도, 토이기, 중국과도 갈이 세계의 활 무대에 등장하고야 말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문제 역시 완전한 해결을 보게될 때까지 결코 끝장이 나지는 않을 것이다.』이러한「파이버」이 판단은 오늘까지도 적중되고 있다. 1차대전 직후에 일제와 항쟁하던 우리민족의 모습이나 2차대전이래 그 정신을 계승한 대한민국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공산도배와 싸우고있는 모습이 비록 다르다고는 해도 과연 얼마나 다를 것이냐. 전쟁의 모습과 규모가 변하였을 뿐이요, 민족의 결심과 기백에는 그다지 변함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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