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신문주간에 돌아본 「자주」수호의 기수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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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우리나라 신문의 초창기가 바로 국가운명이 풍전등화 같았던 때이었고, 경술년8월, 나라가 망할때까지 남아있었던 몇몇 신문이 국가와 운명을 같이한 결과 그 후 10년간 이 사회에서언론이란 것을 찾아볼 수 없어 문자 그대로 암흑시대가 출현했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했기 때문에 초창기의 신문들이 무엇보다도 정부를 편달하며 국민을 계몽함과 동시에 노조와 같이 밀려드는 외국세력에 저항하였다는 점을 중시해야 할 것이다. 그때의 신문들이야말로 구국운동에 총력을 기울였던 것인데, 만약 오늘의 신문에 권력에 저항하는 정신이 있다고 하면 이것은 초창기의 신문들이 세워준 전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에 있어 신문으로써 구국을 하고 신문으로써 외세에 저항했던 분이 적지 않지만, 그 현저한 분을 찾아보려고 하면 먼저 장지연선생을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선생은 1864년 상주출생으로 1895년 과거에 급제, 내무주사를 지낸바있고 1898년, 즉 독립신문이 창간된지 3년후에 창간된「대한황성신문」을 그 다음해에 양수하여 「황성신문」으로 개제발간 함으로써 신문계에 투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98,99년께로 말하면 청일전쟁 민후시해사건 등으로 인하여 청·일 양국 세력이 후퇴함으로써 대외관계가 소강상태에 있었으나 1900년부터 노서아세력이 급가함에 따라 이에 대항하려는 일본과의 사이에 전단이 벌어진 것은 1904년이었다.
이해에 한일의정서란 것이 작성되었고, 다음해에 일본의 승리로 전쟁이 종결됨에 뒤이어 일본은 소위 을사조약이란 것을 우리에게 강요했던 것이다.
이 을사조약이 발표될 때 선생이 황성신문지상에 쓴 사설의 제목이 유명한 「시일야 방성대곡」이란 것이었다. 그 내용은 그리 대단한 것이 못 되지만, 그 제목은 온 국민의 심정을 그대로 표현한 것 이었다. 1905년11월20일자 신문에 실렸던 이 사설내용을 간추려보면 『이등이 한국에 올 때는 우리의 독립을 공고히 할 방략을 권고하리라고 믿었던 것인데 무엇 때문에 5조약을 제출하였는가. 이것은 우리 대황제폐하께서 강경히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돈견만도 못한 대신들이 이를 수락함으로써 보국의 적이 되어 3천리강토와 5백년 종사를 타인에 바치고 2천만동포를 타인의 노예로 만들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이 세상에 살아서 우리 황제페하를 대할 것이며, 무슨 면목으로 우리2천만동포를 대할 것이냐. 아! 통분하다. 남의 노예가 된 우리 2천만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이래 4천년의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멸망하고 말았는가, 통분하고 통분하다. 동포여』라고 한 것 이었다. 이글 때문에 황성신문은 정간되고 선생은 옥고를 치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 다음해에 대한자강회를 발기했고, 1908년에는 노령해삼위로 가서 해조신문주필로 있었고, 그 다음해에는 진주에서 경남일보를 창간했던 것이다. 선생은 나라가 망한지 10여년후인 1921년10월2일에 58세를 일기로 이 세상을 떠났으니 참으로 한 많은 일생이 아닐 수 없다.
장지연선생은 한말의 신문계에 있어서만 위대했던 것이 아니고 우리 문화면에 있어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던 것이다. 최초의 우리 사상사라고 할 수 있는 유교연원을 저술하였고, 정다산의 「강역고」에 백두산정계비고등을 첨가한 「대한강역고」를 편저해서 독도가 우리국토임을 주장했고, 교과서용인「대한신지지」,「동국역사」등을 저술했고, 대한예전과 증보문헌비고의 편저에 참여했고 기타의 저술로는 「동국유사」,「일사유사」,「대동시선」,「농정전서」,「대동문수」,「동유기」, 「만국사물기원역사」등이 있는데 사물기원역사는 서양의 새로운 사물을 우리에게 소개한 것이다. 이상 저술로 보아 선생이 얼마나 박학하였던 가도 알 수 있다. <조산일보부사장>유봉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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