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6> 제74화 한미 외교 요람기(83) 한표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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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제3차 한일회담에서「구보다」가 그런 망언을 한 우리측 홍진기 대표와의 논쟁의 시말은 일본 아사히신문에 의해 상세히 보도됐다.
당시 홍 대표와「구보다」간에 벌인 논쟁을 회의 의사록(53년15월5일)을 통해 알아본다.
▲구보다=일본은 대한청구권이 있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타협하여 해결할 마음가짐도 있다. 귀 측에 청구권이 있고 우리 쪽에는 없다는 태도로는 곤란하다.
▲홍진기대표=우리의 청구권주장은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분리됨에 수반되는 청산 문제다. 일본의 주장은 정치적이다. 성질이 다르기 때문에 양보하여 해결할 수 없다. 일본측이 그렇게 말한다면 우리도 생각을 고치지 않을 수 없다.
▲구보다=우리의 청구권도 법률문제다.
▲홍대표=한국의 국회에서는 한일합방 이후의 학살사건 또는 36년간의 통치 중 치안유지 법으로 옥사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청구권을 제출하고 조선 쌀을 세계시장 가격보다 부당하게 싼값으로 가져간데 대해 차액의 반환을 요구하자는 의견도 있다. 일본측은 미리 예측 해 조치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우리는 일본이 이러한 청구권을 내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일본측이 36년간의 축적을 되돌리라고 한다면 한국 측으로서는 36년간의 피해를 생각하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구보다=한국 측에서 국회의 의견이 있기 때문에 그 같은 청구권을 내는 것이라면 일본으로서도 조선의 철도나 항만을 축조하거나 농지조성을 하는데 여러 햇 동안 2천만 엔이나 지출했으므로 이것들을 판재 하라고 주장하여 한국 측의 정치적 청구권과 상쇄시키려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홍대표=당신은 일본이 오지 않았다면 한국인은 잠자고 있었다는 전제로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일본이 오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보다 잘해 왔을지 모른다.
▲구보다=잘되었을지도 모르지만 형편이 나빴을지도 모른다. 사건으로 말하지만 내가 외교사 연구를 한 바에 의하면 당시 일본이 하지 않았으면 중국 이든가 러시아가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유태하대표= 「구보다」 씨, 그런 말을 하면 회의가 되지 않는다. 일본측은 지난 일을 미안하다는 기분으로 얘기해야한다.
▲구보다=서로 장래의 문제를 생각하고 싶다. 법률적인 청구권문제로 이야기를 해가고 싶다.
▲홍대표=법률적인 것이라 해도당시 일본인의 사유재산이 한국인과 동일한 입장에서 축적되었다고 생각하는가.
▲구보다=대체로 36년간이란 것은 자본주의 경제구조 하에서 평등하게 취급된 것이다. 시대을 고려해주기 바란다.
▲홍대표=왜 카이로선언에 「한국인민의 노예 상태」 란 말이 사용돼있는 것인가.
▲구보다=사견이지만 그것은 전쟁중 흥분한 심리상태에서 쓰여진 것으로 나는 노예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 4조B항은 베르사유조약의 해석과 마찬가지로 이전조치에 대해서 그 배상과 함께 청구권도 있는 것이다.
▲홍대표=이전 명령의 내용이 문제다. 미군정법령 제35호에는 「소유된다」 란 말이 들어있다. 이것은 선례가 없는 말이다.
미국은 처분의 당사자로서 일본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가졌다고 말하고있다.
일본이 이를 국제법위반이라고 말한다면 구상청구권은 미국에 대하여 제기하는 것이 좋겠다. 베르사유조약 당시와 2차 대전 당시와는 사유재산의 처분방법이 다르다. 영토도 평화조약 체결 전에 일본의 동의를 얻지 않고 처분하였다. 이것도 전례가 없다.
▲구보다=사견이기는 하나 사유재산을 몰수하는 것은 더욱 위반이라고 생각한다. 설사 미국이 국제법을 위반했다해도 일본은 미국에 대한 청구권은 포기하고 있다.
▲홍대표=행위자(미국)가 몰수라고 평하고있지 않은가.
▲구보다=행위자가 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가장 권력을 가진 자가 국제법을 만든다는 것으로 되지 않는가?
▲홍대표=근대전과 같은 총력전에서는 사유재산이 전쟁목적을 위해서 총동원된다. 이런 점에서 전후의 사유재산 처리방침이 결정되어 왔던 것이다. 당신은 샌프란시스코조약을 국제법위반이라고 생각하는가.
「구보다」의 이 같은 망언으로 말미암아 회담은 개최 된지 15일만에 결렬되고 말았다.
그후 1년이 지났을 무렵 미국은 「극동의 안전」 을 내세워 한일양측에 회담을 재개할 것을 종용했다 .특히 국무성은 워싱턴에 있는 한일 양국대사관을 통해 갖가지 압력을 넣었다.
그때 양 대사와 나는 『미국인들이 아직도 일본의 간계를 모르고 있으니 기회 있을 때마다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불러 일으키라』 는 이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강연회·파티 장 등 찾아다니며 일본의 무성의를 비난하고 다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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