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중앙] 최초공개 | 흥선대원군 외손녀이자 이회영 며느리 조계진의 일제 강점기 회상
“백범은 내게 영친왕을 알아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청나라서 귀국한 대원군 외면한 고종… “두 사람은 말 한마디 없었다” ■백범, 조계진에게 “사실은 내가 국모 살해한 자를
-
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당시 한국의 형편은 어떠하였던가? 제2차 세계대전의 말기 독·이 양국이 먼저 항복하고 일본이 혼자서 악전고투할 때 일본의 최강군이라는 만주의 관동군은 이미 대부분이 남방으로 이동해
-
주사 민병기씨 통해 박정희 의장에 딱한 사정 호소
영친옥의 한국을 위해서 애를 쓴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그중에서도 진명여고 이세정, 숙명여고 문남식, 양정고교 엄경빈씨 등 교장선생들의 노고와 정성이란 이만저
-
(148)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전 일본육군사관학교 동기생들이 본 영친왕)이왕 전하 도전정순 이왕 전하는 명치30년(1897) 10월20일 어탄생, 이왕 조제 26대 이태 왕의 책7남자, 명치38년 왕세손에,
-
해방에서 환국까지
평소에 별로 말이 없는 영친왕도 그날만은 이렇게 말씀하였다. 『나는 미나미(남) 총독 때의 창씨제도에도 찬성하지 않았소. 건공(이정공)의 일본귀화에도 반대하였는데 무엇이 좋아서 일
-
(127)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4·19 혁명당시 필자는 서울에 있었는데 하루는 미국에 계신 영친 왕비로부터 한 장의 편지가 왔다. 내용은 오래간만에「뉴요크」에 와서 아들(구)내외의 신혼생활을 보고 매우 즐거웠다
-
(134)|해방에서 환국까지-정신적 고초로 인한 뇌혈전증 명의들의 진력에도 호전 안돼
동경 성로가 병원장의 말을 들으면 영친왕의 명세는 고혈압으로 인한 뇌혈전증으로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으며 말조차 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그 전날까지만 해도 약간 정신
-
(107)김을한|해방에서 환국까지
동경에 있는 영친왕의 저택이 국 유니까 즉시 반환케 하라는 이대통령의 성화같은 독촉에도 불구하고 김용주 공사나 신성모 대사는 당시 일본정부의 견해나 스캡(연합국최고사령부)의 바임이
-
(125)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이 대통령이 윤 대비의 환궁을 기뻐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모순이 있다. 첫째 과거 10년 동안이나 윤 대비를 정능에 있게 한 장본인은 다름 아닌 이 대통령 자신인데 마치 그런
-
(68)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영친왕은 그해 12월에 육군중장에 승진하고 다음해 7월에는 우도궁 제51사단장에 임명되어 8월에는 벌써 부대를 이끌고 북지의 금주로 출발하였다. 소위 만주사변이 일어난지도 벌써 1
-
(87) 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8·15 해방이 되었을 때 영친왕은 누구보다도 아버님 고종황제를 생각하였었다. 큰 어머님 명성황후가 일본 장사패에 의해서 참혹한 죽음을 한 이래 평생을 두고 일본을 원망하고 저주하
-
(1)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구왕실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이은씨가 지난 63년 11월22일 환국이래 줄곧 병상에 누워 있다가 약 6년반만인 지난 1일 73세를 일기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난 것은 이미 널리
-
(92)김을한|해방에서 환국까지
불행하게도 교통사고로 죽은「지미·김」(길준)과 그의 부인 그리고 어린 아들의 세 유해는 동경에 있는 미국인 교회에서 영결식을 거행한 후「요꼬하마」(횡빈) 화장 장에서 불살랐다. 그
-
(7)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이것은 8·15해방 후 미군정 때의 일이다. 당시 입법의원에서는 반민 법안을 상정하고 누가 민족반역자이고, 아닌 것을 토의하였는데, 하루는 박건웅이라는 의원이(그후 이북으로 간 공
-
11명이 우승
제4회「아시아」「아마·복싱」선수권대회 파견 후보선수 선발대회가 15일 서울운동장 특설「링」에서 폐막, 김영식 (플라이급) 고생근(밴텀급) 박조 (라이트·미들급)등 11명의 우승자가
-
(16)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금릉위(박영효)는 과거 갑신정변 때 김옥균과 함께 혁명을 일으킨 투사였던 만큼 사랑하는 손녀의 장래를 위해서도 그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지 이우 공에게서 받은 단자와 반지를 일
-
(15)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이우 공 비 박찬주 여사는 철종 황제의 부마(임금의 사위)인 금릉위 박영효 후작의 손녀인바 이갈 공이 일본황족에게 장가를 가지 않고 이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기까지에는 실로 눈물겨운
-
(71) 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1940년 여름- 즉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전 해에 동경 「히비야」 (일비곡) 공회당에서는 한성준 일행이 조선의 고전 무용을 공연하여 전문가들의 격찬을 받고 있었다. 한성준씨
-
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영친왕 비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방자 부인은 그렇게 말하거니와 사실 해방 후 영친왕의 오뇌와 번민이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일본의 패전으로 조국은 해방되었다고 하지만
-
(20)|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영친왕이 항상 마음속으로 송구하게 생각하는 분이 하나있었으니 그분이 즉 의친왕이다. 의친왕(전 이강 공)은 고종황제의 제2왕자이므로 만일 순서대로 한다면 그분이 왕위계승자로 왕세자
-
(149)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육군대학에서는 전하는 나보다 2년 선배였는데 가끔 마술 시간이 함께 되어 외양간에서 마장으로 가는 도중에 만나 뵐 기회가 많았다. 그럴 때면 반드시 무언가 은화 하게 말씀을 해주시
-
4체급 8명 결승진출
8일 서울운동장「트레이닝·룸」에서 속행된 대통령배쟁탈 전국 시 도 대항「아마·복싱」대회는 「라이트·플라이」급부터 「페더」급까지 8명이 결승에 올랐다. 이날 「라이트·플라이」급 김치
-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 요약 ⑭
『별건곤』 제39호(1931년 4월 1일호)는 「조선 사람은 왜 가난해지나?」라는 기사에서 “몇몇 부자사람을 제하고 나면 조선사람은 똥가래가 찢어지게 가난하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
〈남기고 싶은이야기들(4241)〉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174)|민세의 청절
1928년 5월 민세는 『제남사건의 피상관』이란 제목의 사설을 썼는데 이 사설에서 민세는 일본의 다나까내각이 중국 산동에 출병을 감행한 것은 무력으로 중국을 침략하려는 명백한 전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