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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 요약 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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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9호 1 면

『별건곤』 제39호(1931년 4월 1일호)는 「조선 사람은 왜 가난해지나?」라는 기사에서 “몇몇 부자사람을 제하고 나면 조선사람은 똥가래가 찢어지게 가난하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일제 식민통치는 자본을 들여와 공장을 설립하는 자본주의 방식이 아니라 식민지 백성들의 농지 등을 빼앗는 근원적 수탈방식이었으므로 더욱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몇몇 부자사람’은 존재했다.


언론인 김을한(金乙漢)은 『삼천리』 1931년 2월 1일호의 「조선 최대 재벌 해부(3)」라는 글에서 “현하(現下) 조선에 있어서 누가 제일 갑부냐고 하면 제1 민영휘(閔泳徽), 제2 김성수(金性洙), 제3 최창학(崔昌學)의 세 손가락을 꼽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민영휘의 부친 민두호는 춘천부 유수(留守)를, 민영휘는 평안감사를 역임하는데 이때 강원도와 평안도 백성들의 재산을 갈취한 것이 조선 제일 갑부가 된 원동력이었다. 황현은 「오하기문」에서 ‘춘천부 유수 민두호의 탐학 때문에 강원도민들은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면서 백성들이 그를 ‘쇠갈고리 민두호[閔鐵鉤·민철구]’라고 불렀다고 전하고 있다.


민영휘를 비롯한 민씨 척족들의 탐학이 전국적 농민봉기의 주요한 원인이 되었는데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민영휘는 청나라의 원세개(袁世凱)에게 파병을 요청했고, 이는 천진조약에 따라 일본군을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민씨 척족이 무너지자 민영휘는 유배지로 가는 대신 청나라 군대에 숨어서 청나라로 도주했다. 이 첫 번째 위기는 고종이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김홍집의 갑오개혁 내각을 무너뜨린 몇 달 후 특지로 징계를 면해주면서 벗어났다. 고종은 재위 38년(1901)에는 민영휘를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해 왕실 업무를 관장시켰고, 재위 42년(1905) 3월에는 정1품 시종원경(侍從院卿)에 임명하고 10월에는 태극장(太極章)까지 하사했다. 『대한매일신보』는 1907년 12월 20일자 논설에서 ‘국사(國事)가 지금에 이른 것은 민영휘와 조병갑의 탐학이 한 원인’이라고 비판했다.


민영휘의 두 번째 위기는 1907년 고종이 헤이그밀사 사건으로 강제 양위당하면서 찾아왔다. 고종이 힘을 잃자 민영휘에게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이 재산을 되찾겠다고 나선 것이다. 『대한매일신보』나 『황성신문』은 1908년경부터 민두호·영휘 부자에게 재산을 빼앗긴 백성들이 부자를 상대로 잇따라 소송을 제기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공립신보』는 1909년 1월 27일자에서 민영휘의 말로란 제목으로 ‘평안감사 재직 때 토색질한 수만금에 대해 억울하게 빼앗긴 백성들이 민씨 집에 답지해서 빼앗긴 물건을 환수하려 하므로 장차 가산이 탕패될 듯 하다더라’고 보도했다. 민영휘는 망국 직후인 1910년 10월 일제에게 자작(子爵)의 작위를 받은 데 이어 이듬해 1월에는 이른바 은사공채(恩賜公債) 5만원을 받았고, 1912년 8월에는 한국병합기념장(韓國倂合記念章)도 받았다. 민영휘는 한일은행장(1915)도 역임하는 등 돈에 대해서는 남다른 감각을 가진 인물이었다. 또한 휘문의숙을 설립하는 등 사회사업을 통한 이미지 쇄신도 꾀했다.


『삼천리』 1938년 10월호는 민영휘를 “조선에서는 고금 몇 백 년 내에 처음 보는 큰 부자”라면서 그가 남긴 재산 규모가 ‘3000만원 혹은 2000만원이라고 말하지만 확실한 측의 조사에 의하면 1200만원 정도’라고 추정하고 있다. 최소 1200만원에 달하는 민영휘의 유산을 현재 가격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갈까. 쌀값을 기준하면 1934년 쌀 1석(160kg) 가격이 22원30전이다. 이를 현재의 10kg 2만5000원 정도로 환산하면 1600억원을 넘는다.


『삼천리』 1930년 11월호의 「조선 대재벌 총해부(一)」란 기사를 쓴 류광렬(柳光烈)은 ‘김성수(金性洙:1891~1955년) 계열의 자본금이 500만원’이라면서 “조선에서 자못 근대식으로 사업을 벌인 재산가(財産家)가 있다면 누구든지 인촌(仁村) 김성수씨를 첫손에 꼽지 아니치 못할 것이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김성수와 민영휘는 공통점과 다른 점을 고루 가진 부호였다. 김성수는 1891년 전북 고창군 부안면 인촌리에서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후손인 김경중(金暻中)의 4남으로 태어났다. 김성수는 세 살 때 백부 김기중(金祺中)의 양자로 출계했지만 부모 품을 멀리 떠난 것은 아니어서 생가와 양가는 솟을대문이 경계 역할을 하는 정도였다. 김기중·경중 형제의 부친 김요협(金堯莢)은 장남 김기중에게 1000석 농토를 주고 김경중에게는 200석 농토만을 주었다고 전하는데 경중의 재산증식 수완이 뛰어나서 1918년에는 형의 750정보보다 훨씬 많은 1300정보를 소유하게 되었다고 한다. 1920년대에 두 형제 농토의 수확은 연 2만 석 이상이 되어 호남에서도 손꼽힐 정도였다. 송진우(宋鎭禹:1890~1945년)는 김성수와 함께 일본유학 길에 올라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 등을 거쳐 1910년 와세다(早稻田) 대학에 입학했다. 송진우는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탈하자 일시 귀국했지만 김성수는 남아서 학업을 계속했다. 1914년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김성수는 이듬해 불과 스물다섯의 나이로 중앙학교를 인수했다.


김기중·경중 형제는 고향에 학교를 세우고 김경중은 『조선사(朝鮮史)』 17권을 출간하는 등 사회와 역사에도 관심이 많았다. 이런 성향이 여타 지주들과는 다른 점이었고, 이는 김성수에게도 유전됐다. 김성수는 와세다대 졸업 1년 전인 1913년 양부와 생부를 모두 일본으로 초청해 와세다대를 구경시키면서 교육사업에 뜻이 있음을 시사했다고도 전한다. 양부 김기중도 부안군 줄포(茁浦)에 영신학교를 설립했던 인물이다. 김성수는 교육사업과 ‘동아일보’라는 언론사업에도 투자했기 때문에 민영휘와 달리 사회의 세평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자연스레 학교·언론을 경영하는 민족 기업가처럼 비쳤다. 그는 이런 이미지를 굳히는 한편 경성방적 등을 통해 근대적 자본주의 경영에 나섰다.


민영휘가 소작료에 의존하는 봉건 부호로 인식된 반면 김성수가 근대적 사업가로 인식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광수는 『동광(東光)』 1931년 9월호에 20개월의 구미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김성수에 대해 「인물월단(人物月旦)」, 「김성수론(論)」이란 글을 썼다. 이 글에서 이광수는 “김성수를 말하면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연상하고 경성방적주식회사를 연상하고 또 동아일보사를 연상할 것이다. 아마 해동은행(海東銀行)도 연상하고 중앙상공주식회사(中央商工株式會社)도 연상할 것이다”라고 김성수의 사업체들을 열거하면서 “이 모든 그가 관계하는 사업을 총칭하야 ‘김성수 콘체른’이라고까지 칭하는 이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독점자본, 기업결합 등을 뜻하는 콘체른(Konzern)은 재벌과 비슷한 의미인데 이광수는 “김성수가 이 모든 사업에 중심인물의 지위를 가진 것이 사실”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김성수는 기업과 금융을 동시에 소유한 최초의 사업가였다. 김성수의 경영스타일도 화제였다. 이광수는 앞의 글에서 김성수는 “한번 사람을 신용해서 무슨 일을 맡긴 후에는 일절 간섭하지 않고 그에게 일임한다. 중앙고보의 인사행정은 중앙고보의 교장에게 일임하고, 경성방적은 전무 이강헌(李康賢)에게, 동아일보는 말할 것도 없이 사장 송진우의 전권”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동아일보 초대 주필 장덕수(張德秀) 가족에게는 8년 동안 미국 유학비를 대주었다”고도 전하고 있다.


김성수의 ‘동아일보’는 이광수와 함께 일제에 타협적인 민족개량주의 노선을 주창하다가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으로부터 불매운동을 당하기도 했지만 일제 치하에서 한국어 신문 경영은 그 자체로 민족주의자란 인상을 주었다.


김성수 형제에게 만주국 수립은 도약의 기회였다. 일제의 대륙침략에 따라 김성수의 동생 김연수는 심양(봉천)과 석가장(石家莊)에 방적회사를 세우는데, 심양의 남만(南滿)방적회사의 건설비만 800만원이 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김성수 형제의 사업에 만주국 수립과 1937년의 중일전쟁은 큰 호재였던 것이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미국 학자 카터 에커트(Eckert)는 경성방직을 일제의 보호와 지원으로 성장한 ‘일제의 아이(Offspring of Empire)’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러나 만주국과 중일전쟁은 새 시장이 열렸다는 기업경영 측면에서는 호재였지만 김성수가 이후에도 민족주의자란 이미지를 유지하기는 어렵게 만들었다. 군국주의가 강화되면서 일제는 민족개량주의마저도 강하게 탄압했기 때문이다. 김성수는 일제의 강요로 친일단체 가담과 학병 권유 연설도 해야 했다. 김연수는 친일단체 가담, 학병 권유 연설, 비행기 헌납 등으로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는 수모를 당했다. 김성수는 해방 후 줄곧 자의는 아니었다고 주장했는데 물론 자의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 대륙침략에 따른 경제적 수혜를 일부 받은 것도 사실이다. 이런 경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우리 사회가 합의에 도달하지 못한 숙제로 남아 있다.


- 이덕일,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제295호 2012년 11월 4일, 제296호 2012년 11월 11일, 제97호 2012년 11월 18일.


제 295 호 | 2012.11.04


http://sunday.joins.com/archives/42527


제 296 호 | 2012.11.11


http://sunday.joins.com/archives/42528


제 297 호 | 2012.11.18


http://sunday.joins.com/archives/4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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