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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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영친왕 비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단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 그렇게도 사랑하던 구를 멀리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기까지에는 여러가지 번민이 많았읍니다. 떠나가는 본인의 슬픔은 물론이요, 우리들 부부도 구가 생활은 생각만하여도 적막하기 짝이 것이었읍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 목전의 감정에만 사로잡혀서 아들의 장래를 가로막아서는 안되겠다는 반성도 컸었으니 그 점은 나보다도 바깥어른이 더 강하였던 것입니다. 종전이래 장차 어떻게 해야할지를 몰라서 무기력하게 세상을 등지고 살아온 바깥어른이 적극적으로 구의 유학을 찬성하고 또 그것을 밀어주신 것은 정직하게 말해서 나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의외의 일이었읍니다.
열 한살 때에 일본으로 끌려온 후로부터는 자기의 뜻은 모두 봉쇄 당한 채 일생을 외부의 압력과 지시에 의하여 지배되어온 바깥어른은 아들 구만큼은 절대로 생활을 속박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한 것이겠지요.
『후회함이 없이 자기가 발견한 길을 자기의 책임과 의지로 마음껏 가보라. 만약 그 길이 적당하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또 자기의 생각으로 다시 하면 된다. 지금에 와서 나더러 마음대로 해보라고 한대도 나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슬픈 일이지만 그것이 사실이다.
장구한 세월을 두고 틀 속에 갇히어 어떻게 하면 자기를 죽이고 살아가느냐를 교육받아온 때문에 이젠 그만 밖으로 나오려고 해도 여간하여서는 나올 수가 없다. 나의 마음과 뜻이 벌써 굳어져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너(구)는 이 아비를 뛰어 넘어서 자유롭게 너 자신을 시험해 보라.』
그 말투로나 그 말 자체에는 조금도 과격한 것이 없었으나 나에게는 그것이 바깥어른의 어렸을 때부터 쌓이고 쌓인 분노의 폭발인 것을 알았읍니다.
『얼마나 슬픈 분노인가…』 그것을 생각하니 고요히 눈물이 흐르고, 뱃속으로부터 울음보가 치켜 오르는 것이었읍니다.
약혼 시대로부터 계산하면 50년 동안 항상 나의 마음은 바깥어른의 옆에 두고 어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마다 함께 참고 견디어온 때문에 마음과 마음이 굳게 결합되어서 나는 바깥어른의 마음속은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아는 아내라고 자부해 왔던 것입니다.
그렇건만 바깥어른의 마음속 깊은 데에는 사랑하는 아들과 장구한 세월을 멀리 떨어져서 사는 한이 있더라도 아들의 장래를 위해서는 상관이 없다는 분노가 축적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까지 나는 무기력한 바깥어른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던 것을 후회하고 또 반성하였읍니다. 그리하여 『이제부터는 내가 강하게 되어서 전하는 그저 고요하게 하고 싶은 대로 사시게 하자…만약 힘이 약한 우리들을 침범하는 자가 있다면 싸우는 것은 나다. 지키는 것도 나인 것이다.』그렇게 생각했을 때 나에게는 새로운 용기와 힘이 솟아오르는 듯하였읍니다.>
방자 부인은 그렇게 말하거니와 사실 해방 후 영친왕의 오뇌와 번민이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일본의 패전으로 조국은 해방되었다고 하지만 38도 선으로 국토는 양단 되고 자기자신은 일본도 아니고 한국도 아닌 국제적 고아가 되었으니 장차 어찌하면 좋을지를 몰랐었다.
그 위에 단 하나 밖에 없는 누이동생 덕혜 옹주는 정략결혼의 희생으로 무거운 정신병에 걸려서 천애 고독한 몸으로 입원한지 이미 오래고 작은조카 이우공은 해방직전에 원자폭탄에 맞아 죽고 큰조카 건공은 갖은 추문을 남긴 채 일본에 귀화하고 거기다 장인되는 「나시모도노미야」(이본궁) 수정왕까지 전쟁범죄자로 「스가모」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나라 일이나 개인 일이나 하나도 시원한 것이 없었다. 아니, 시원한 일이 없었을 뿐더러 그 어느 것이나 자기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불행한 일이고 또 걱정거리였다.
그리하여 영친왕의 마음은 자연 서울에 홀로 계신 국모 윤 대비 마마와 이미 세상을 떠나신지 오래된 아버님 고종황제와 어머님 엄비에게로 쏠리는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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