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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고칠 곳 많다
일본정부는 7일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가 만든 『신편 일본사』교과서의 검정 결과를 우리 외무부에 통보해 왔다. 그간 두 나라 사이뿐 아니라 일본군국주의에 희생된 아시아 나라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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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교과서 일부만 시정
【동경=최철주특파원】한일간 크게 문제됐던 일본의 교과서 왜곡내용이 일본문부성의 지시에 따라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가 최종 수정작업을 끝내 『신편일본사』로 출판됐으나 지엽적인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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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교과서 시정약속 묵살
【동경=최철주 특파원】최근 일본 문부성의 심의를 통과, 인쇄중인 『고교 일본사』는 일 정부가 2년 전에 시정을 약속했던 대 한국관계 역사기술이 거의 지켜지지 않거나 아예 언급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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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당시의 미국여론
한국이 세계여론의 대상이 되기는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을 거쳐 일본의 보호국이 되면서부터다. 한일합병이 강행되자 당시 미국내 여론은 일부 동정적 태도를 보이면서도 일본의 한국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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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3)-제82화 출판의 길 40년(46)-일제의 금서정책(상)
한말 일제가 우리의 주권을 빼앗고 처음으로 금서처분의 폭거를 자행한 것은 1909년 5월5일자로 기록되고 있다. 이미 1905년에 강압으로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뒤인지라 그들이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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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새시대는 민간우호 바탕위에|대담 기전위 김달수
한국과 일본, 숙명적인 이웃이면서도 가깝지만은 않았던 두나라다. 전두환 대통령의 방일로 이 두나라 사이에 새시대의 문이 열렸다고들 한다. 과연 한일관계는 새시대로 접어든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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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회담(246)|수교 공동성명 구상
나는 현안타결에 관한 나의 방안을 대통령이 나에게 지시하는 형식으로 작성했다. 이후락비서실장방에서 대통령비서실용전을 사용해 만든 대통령지시는 다음과같다. 『급격한 국제정세에 대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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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공부 업무보고 요지
▲수출입 정책 = 올해 수출 목표액 2백70억 달러 중 중화학 제품은 전체의 55.6%인 1백50억 달러로 책정했다. 지금까지 조선 부문에 치우쳤던 연 불 수출 지원을 기계 및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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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화 한일회담(50)유진오-한일합방 조약 무효 확인
우리가 한일합방 조약의 무효 확인을 기본 조약에 굳이 명문화하려는 것은 보리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국민적 자존심을 응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비록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합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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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17) 제80화 한일회담(16) 재일교포 문제
임송본씨와 나는 동경에 도착한 즉시 한일회담을 여느데 필요한 여러가지 문헌과 자료를 수집했다. 또 나는 일본법무성과 언론계인사들을, 임씨는 대장성과 금융계인사들을 접촉하고 일본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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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16) 제80화 한일회담 (15)|주일 대표부
나와 임송본 조선식산은행총재가 51년7월20일 한일회담준비를 의한 자료수집차 동경에 도착해보니 비록 판자가건축이 드문드문한 거리이기는 하지만 쓰레기통을 엎어놓은 것 같은 부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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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화 한일회담(4) 배상청구 위원회
정부는 49년2월에 기획처 기획국에 「대일배상청구위원회」를 두어 은밀하게 배상청구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이순탁 기획처장과 나는 48년 가을 대일배상청구조서를 작성키로 여러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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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데라우찌』의 총칼|발굴자료와 새증언으로 밝히는 일제통치의 뒷무대
○…1910년10월1일-. 이날은 조선총독부가 문을 연 날이다. 초대조선총독 「데라우찌·마사다께」(사내정의)는 일본인 관리들에게 훈시했다. 『오늘부터 천황폐하의 은혜를 입게된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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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한제국의 최후(5)
일본의 한국 병합 공작에 항쟁한 안중근 의사는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있다. 그는 을사조약을 강요했던 [이또]를 저격함으로써 민족의 독립의지를 내외에 시위했다. 그는 일본법정을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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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36년대한제국의 최후④|발굴자료와 새증언으로 밝히는 일제통치의 뒷무대
한국을 병합한 일본은 그 기념비를「우찌다」의 집에 세웠다. 일진회를 조종하고 일본정계의 병합운동을 채찍질한 야인「우찌다」의 역할이 얼마나 컸던가를 말해주는 증거다. 「우찌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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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 5백35개소
둘째는 재벌귀족층이다. 삽택영일이 l904년에 창설했던 한국전업주식회사는 황해도·전남·충남·경북·경남등지에 걸쳐서 l만9천8백50정보의 농지를 점유하였다. 삼능재벌의 종가인 암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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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한일합방」-「조약」은 허울 사실은 무력강점
한국근현대사에 있어서 한일관계의 잘못은 1875년의 운양호사건에서 1910년의 경술국치에 이르는 구한말 일제침략에서부터 문제가 되고 있다. 이어서 1945년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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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기찬 의병항쟁
이와 마찬가지로 정미신조약이나 한일 「합병조약」이라 하는 것도 을사보호조약 같이 일제가 그 침략군의 힘을 빌어서 강탈한 내정권을, 나아가 국가의 주권을 송두리째 합리화내지 합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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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가 분석한 일교과서 왜곡내용
◇한일세정서 ▲1904(명치37)년 2월 일한의정서를 체결하고 한국의 안전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것, 그것을 위하여 군략상 필요한 토지를 수용하는 것 등의 권한을 한국으로 하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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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국망령」버리지 못한 증거"
【동경=신성순 특파원】일본 군국주의 침략사를 왜곡하는 교과서 검정에 한국·미국·중공·소련 등 국제적으로 비난이 집중되자「오가와」(소천평이)일본 문부상과「마쓰노」(송야행태)국토청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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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제71화 경기80년-정구충
나는 계산소학교(현 대동상고자리)를 졸업했다. 계산학교는 우리 나라 개화운동가인 유길준(갑오개혁 때 김홍집내각의 내부대신)·유성준형제가 설립한 귀족학교로 설립자의 영향을 받았음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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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1화 경기 80년사|일인교사 급증 수업시간에는 한국인 교사가|통역지원자 해마다 늘어 입시경쟁 치열
을사보호 조약 후 통감부의 정치와 더불어 1906년 8월초부터 궁내부와 내부이하 각부에 일본인 차관이 임명되어 이른바 차관정치가 실시되었다. 학부에도 일본인으로 차관이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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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9)-설야사
한국은 부산·인천·원산에 해관을 설치했으나 세관행정이 전연 생소하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두모진사건으로 창피를 톡톡히 당하자 초기 해관을 구국정부에 위촉 관리케 했다. 청국 이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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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제 2장 일본속에 맺힌 한인들의 원한|제 9화 고균 김옥균의 유랑 행적기(6)
전회(본 연재 43회)에서 언급했지만 수영문고에 소장돼있는 한국 관계자ㅛ와 구 한말 정객들의 서화 컬렉션 등은 그 질로 보나 분량으로 보나 언제든 한번쯤은 다시 한국에 가져와 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