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아직도 고칠 곳 많다

    일본정부는 7일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가 만든 『신편 일본사』교과서의 검정 결과를 우리 외무부에 통보해 왔다. 그간 두 나라 사이뿐 아니라 일본군국주의에 희생된 아시아 나라들이

    중앙일보

    1986.07.09 00:00

  • 일 교과서 일부만 시정

    【동경=최철주특파원】한일간 크게 문제됐던 일본의 교과서 왜곡내용이 일본문부성의 지시에 따라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가 최종 수정작업을 끝내 『신편일본사』로 출판됐으나 지엽적인 부

    중앙일보

    1986.07.08 00:00

  • 일, 교과서 시정약속 묵살

    【동경=최철주 특파원】최근 일본 문부성의 심의를 통과, 인쇄중인 『고교 일본사』는 일 정부가 2년 전에 시정을 약속했던 대 한국관계 역사기술이 거의 지켜지지 않거나 아예 언급조차

    중앙일보

    1986.06.05 00:00

  • 3·1운동 당시의 미국여론

    한국이 세계여론의 대상이 되기는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을 거쳐 일본의 보호국이 되면서부터다. 한일합병이 강행되자 당시 미국내 여론은 일부 동정적 태도를 보이면서도 일본의 한국에 대한

    중앙일보

    1986.03.01 00:00

  • (4293)-제82화 출판의 길 40년(46)-일제의 금서정책(상)

    한말 일제가 우리의 주권을 빼앗고 처음으로 금서처분의 폭거를 자행한 것은 1909년 5월5일자로 기록되고 있다. 이미 1905년에 강압으로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뒤인지라 그들이 대

    중앙일보

    1985.06.04 00:00

  • 한일 새시대는 민간우호 바탕위에|대담 기전위 김달수

    한국과 일본, 숙명적인 이웃이면서도 가깝지만은 않았던 두나라다. 전두환 대통령의 방일로 이 두나라 사이에 새시대의 문이 열렸다고들 한다. 과연 한일관계는 새시대로 접어든 것일까.

    중앙일보

    1984.09.22 00:00

  • |한일회담(246)|수교 공동성명 구상

    나는 현안타결에 관한 나의 방안을 대통령이 나에게 지시하는 형식으로 작성했다. 이후락비서실장방에서 대통령비서실용전을 사용해 만든 대통령지시는 다음과같다. 『급격한 국제정세에 대처하

    중앙일보

    1984.06.23 00:00

  • 상공부 업무보고 요지

    ▲수출입 정책 = 올해 수출 목표액 2백70억 달러 중 중화학 제품은 전체의 55.6%인 1백50억 달러로 책정했다. 지금까지 조선 부문에 치우쳤던 연 불 수출 지원을 기계 및 부

    중앙일보

    1984.01.30 00:00

  • 제80화 한일회담(50)유진오-한일합방 조약 무효 확인

    우리가 한일합방 조약의 무효 확인을 기본 조약에 굳이 명문화하려는 것은 보리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국민적 자존심을 응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비록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합방

    중앙일보

    1983.10.27 00:00

  • (3817) 제80화 한일회담(16) 재일교포 문제

    임송본씨와 나는 동경에 도착한 즉시 한일회담을 여느데 필요한 여러가지 문헌과 자료를 수집했다. 또 나는 일본법무성과 언론계인사들을, 임씨는 대장성과 금융계인사들을 접촉하고 일본측

    중앙일보

    1983.09.15 00:00

  • (3816) 제80화 한일회담 (15)|주일 대표부

    나와 임송본 조선식산은행총재가 51년7월20일 한일회담준비를 의한 자료수집차 동경에 도착해보니 비록 판자가건축이 드문드문한 거리이기는 하지만 쓰레기통을 엎어놓은 것 같은 부산에서

    중앙일보

    1983.09.14 00:00

  • 제80화 한일회담(4) 배상청구 위원회

    정부는 49년2월에 기획처 기획국에 「대일배상청구위원회」를 두어 은밀하게 배상청구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이순탁 기획처장과 나는 48년 가을 대일배상청구조서를 작성키로 여러차례

    중앙일보

    1983.09.01 00:00

  • (16)|『데라우찌』의 총칼|발굴자료와 새증언으로 밝히는 일제통치의 뒷무대

    ○…1910년10월1일-. 이날은 조선총독부가 문을 연 날이다. 초대조선총독 「데라우찌·마사다께」(사내정의)는 일본인 관리들에게 훈시했다. 『오늘부터 천황폐하의 은혜를 입게된 조선

    중앙일보

    1983.07.04 00:00

  • (5)-대한제국의 최후(5)

    일본의 한국 병합 공작에 항쟁한 안중근 의사는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있다. 그는 을사조약을 강요했던 [이또]를 저격함으로써 민족의 독립의지를 내외에 시위했다. 그는 일본법정을 거부

    중앙일보

    1983.04.18 00:00

  • 잃어버린 36년대한제국의 최후④|발굴자료와 새증언으로 밝히는 일제통치의 뒷무대

    한국을 병합한 일본은 그 기념비를「우찌다」의 집에 세웠다. 일진회를 조종하고 일본정계의 병합운동을 채찍질한 야인「우찌다」의 역할이 얼마나 컸던가를 말해주는 증거다. 「우찌다」가 「

    중앙일보

    1983.04.11 00:00

  • 농장 5백35개소

    둘째는 재벌귀족층이다. 삽택영일이 l904년에 창설했던 한국전업주식회사는 황해도·전남·충남·경북·경남등지에 걸쳐서 l만9천8백50정보의 농지를 점유하였다. 삼능재벌의 종가인 암기가

    중앙일보

    1982.12.09 00:00

  • (17) 「한일합방」-「조약」은 허울 사실은 무력강점

    한국근현대사에 있어서 한일관계의 잘못은 1875년의 운양호사건에서 1910년의 경술국치에 이르는 구한말 일제침략에서부터 문제가 되고 있다. 이어서 1945년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중앙일보

    1982.12.02 00:00

  • 줄기찬 의병항쟁

    이와 마찬가지로 정미신조약이나 한일 「합병조약」이라 하는 것도 을사보호조약 같이 일제가 그 침략군의 힘을 빌어서 강탈한 내정권을, 나아가 국가의 주권을 송두리째 합리화내지 합법화

    중앙일보

    1982.12.02 00:00

  • 국사편찬위가 분석한 일교과서 왜곡내용

    ◇한일세정서 ▲1904(명치37)년 2월 일한의정서를 체결하고 한국의 안전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것, 그것을 위하여 군략상 필요한 토지를 수용하는 것 등의 권한을 한국으로 하여금

    중앙일보

    1982.08.06 00:00

  • "「군국망령」버리지 못한 증거"

    【동경=신성순 특파원】일본 군국주의 침략사를 왜곡하는 교과서 검정에 한국·미국·중공·소련 등 국제적으로 비난이 집중되자「오가와」(소천평이)일본 문부상과「마쓰노」(송야행태)국토청 장

    중앙일보

    1982.07.26 00:00

  • (8)제71화 경기80년-정구충

    나는 계산소학교(현 대동상고자리)를 졸업했다. 계산학교는 우리 나라 개화운동가인 유길준(갑오개혁 때 김홍집내각의 내부대신)·유성준형제가 설립한 귀족학교로 설립자의 영향을 받았음인지

    중앙일보

    1980.11.08 00:00

  • 제71화 경기 80년사|일인교사 급증 수업시간에는 한국인 교사가|통역지원자 해마다 늘어 입시경쟁 치열

    을사보호 조약 후 통감부의 정치와 더불어 1906년 8월초부터 궁내부와 내부이하 각부에 일본인 차관이 임명되어 이른바 차관정치가 실시되었다. 학부에도 일본인으로 차관이 임명되었다.

    중앙일보

    1980.11.07 00:00

  • (1359)-설야사

    한국은 부산·인천·원산에 해관을 설치했으나 세관행정이 전연 생소하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두모진사건으로 창피를 톡톡히 당하자 초기 해관을 구국정부에 위촉 관리케 했다. 청국 이홍장

    중앙일보

    1975.06.09 00:00

  • (44)|제 2장 일본속에 맺힌 한인들의 원한|제 9화 고균 김옥균의 유랑 행적기(6)

    전회(본 연재 43회)에서 언급했지만 수영문고에 소장돼있는 한국 관계자ㅛ와 구 한말 정객들의 서화 컬렉션 등은 그 질로 보나 분량으로 보나 언제든 한번쯤은 다시 한국에 가져와 전시

    중앙일보

    1974.01.11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