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16) 제80화 한일회담 (15)|주일 대표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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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나와 임송본 조선식산은행총재가 51년7월20일 한일회담준비를 의한 자료수집차 동경에 도착해보니 비록 판자가건축이 드문드문한 거리이기는 하지만 쓰레기통을 엎어놓은 것 같은 부산에서 간 사람의 눈에는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임씨와 나는 메구로(목흑)에 있는 기야마(기산) 호텔이라는 여관에 들었는데, 그집은 예전「모오리」(모이)공작의 저택이어서 순 일본식 건물이지만 크고 무게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내 눈에 부러운 것은 그집 목욕탕이었다. 넓은 욕실 한복판에 있는 큰욕조에는 언제나 옥같이 맑은 뜨거운 물이 철철 넘쳐흐르고 있었다.
부산에서는 물난리가 계속되어 남부민동 이발관에서는 곧잘 구린내 나는 시궁창의 물을 길어다가 시치미를 떼고 손님 머리를 감아주곤 했는데… .
일본경제는 한국동란으로 인한 소위 특수경기 때문에 활발하게 부흥, 번영의 길을 치달리고 있었지만 일본사회는 아직 전후의 혼란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패전, 경제적 궁지, 외국군정, 그리고 국내 모든 기성권위의 몰락등으로 공산주의와 퇴폐향락의 기풍이 판을 치고 있었다.
우리 주일대표부가 들어있던 번화가 긴자(은좌)네거리의 핫또리(복부)빌딩 4층에는 툭하면 조련계 교포들이 도시락을 싸가지고 와서 계단과 복도를 점령하는가 하면, 한걸음 빌딩을 나서면 대낮에도 묘령의 양공주들 (팡팡이라 불리는) 이지하철 입구 같은데서 행인을 낚아채고 있었다.
그때 주일대표부 대표는 김용주씨의 후임으로 국방장관을 지낸 신성모씨가, 참사관에는 갈홍기씨의 후임으로 유태하씨가 각각 서울에서 새로 부임해 있었지만 갈씨는 여전히 참사관 격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점령군 최고사령부 (SCAP)와의 접촉에 갈씨의 영어를 활용하기 위해 신성모 공사가 붙들어 앉혔다는 얘기였다.
주일대표부가 일본에 개설된것은 정부수립 직후인 49년1윌14일이었다. 주일대표부는 다른 외국의 주일대표와 마찬가지로 SCAP에 대해 파견된 외교사절이었다. 당시 일본은 점령군의 군정하에 있었기때문에 외교권이 없었고 따라서 외국과의 교섭사항은 일단 SCAP을 통해야했다. 신임장도 SCAP측에 제정했다.
49년1월14일 상오9시, 정한경 대사를 비롯한 3, 4명의 대표부직원들은 태극기를 창밖에 비스듬히 게양하는 일로 주일대표부의 첫업무를 시작했다.
1910년8월29일 일본제국의 강압에 굴복해 이른바 「한일합병조약」을 맺은 이래 적지 일본땅에서 잃었던 주권을 당당히 과시한 그날의 광경을 당시 신문들은 『감격, 또 감격』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초창기 주일대표부에 근무했던 작가 강노향씨(본명 강성구)가 펴낸 『주일대표부』란 책을 보면 특히 개설 첫날 재일교포들의 감회는 남달랐던것같다.
『4, 5년전까지만해도 일장기를 억지로 문전에 세워야했던 재일 한교들. 긴 암흑기를 거쳐 새로이 태극기 아래 뭉치게된 그들은 국기와 조국을 되찾은 싱그러운 감동에 눈시울을 붉혔다』
이렇게해서 개설된 주일대표부는 내가 갔을때는 그짧은 기간에 초대 정대사, 2대 정환범대사, 3대 신흥우대사와 4대 김용주 공사를 거쳐 5대 신성모 공사로 이어질 정도로 바람 잘날 없는 공관이었다.
초대 정대사는 단8일간 근무하고 사표를 제출한 분으로 알고있다. 그는 또 아마 우리나라 외교사중에서 유일무이하게 법률적으로 외국인이면서 외교관이 된 사람이아닌가 생각한다.
미국시민권을 갖고 콜럼비아대학에서 교편까지 잡았던 정박사가 외교중책을 맡게된것은 일제때 미국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독립운동을 한 교분 때문이었던것같다.
정씨는 이대통령이 대일배상을 SCAP측과 협의해 관철하라는등의 강력한 훈령과, 그에 대한 SCAP측의 냉담한 반응, 그리고 교포들의 진정과 청원사태에 덧붙여 조련(조총련전신)세력의 발호등에 8일 이상을 더 버티지 못하고 사표를 제출했으나 이대통령의 간곡한 만류로 한달을 더 근무했다. 그러나 역시 그는 상아탑의 학자였지 북새통을 살아갈 위인이 못돼 한국외교사상 최단명의 대사재임 기록을 남긴채 미국으로 떠나버렸다고 한다.
불과 30개월만에 5명의 공관장을 맞아야했던 주일대표부의 대사관 승격은 그로부터 14년 후에 이루어졌을 만큼터가 세다면 센곳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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