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5>제80화 한일회담(4) 배상청구 위원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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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정부는 49년2월에 기획처 기획국에 「대일배상청구위원회」를 두어 은밀하게 배상청구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이순탁 기획처장과 나는 48년 가을 대일배상청구조서를 작성키로 여러차례 논의했다. 대저 우리가 모두 우리나라 대외조약체결 1호인 「한미간의 재정및 재산에 관한 최초협정」(48년9월11일 체결)의 협상에 참여한 연유로 그 문제를 의논하게 됐던 것 같다.
그런데 우리의 이 같은 논의와는 별도로 당시 법무부에서도 이에 관해 활발한 내부협의가 있었던 것 같은데 당시 법무부조사국장이었던 홍진기씨의 회고는 이렇다.
『1948년 법무부조사국장 때의 일이다. 그 당시의 장관 이인씨가 국장회의 때마다 각국장들에게 숙제를 내어 전국에 긴요한 사업의 구상을 건의하도록 하여 이중에서 적절한 것을 이승만대통령에게 다시 건의하곤 했다.
이러한 건의의 하나로서 내가 제안한 것이 「대일강화회의 준비위원회」의 설치안이었다.
즉 대한민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한 것이니 한일간의 제문제, 즉 한일합병조약·배상·재일교포·귀속재산등의 처리를 건의할 자료의 수집, 기타의 준비를 하는 위원회를 두고 그 사무국을 나의 조사국에 ,두자는 안이었다.
이장관은 훌륭한 구상이라고 하면서 이대통령께 이를 건의했다. 이대통령은 점령군 최고사령관(SCAP)「맥아더」원수가 8·15건국일에 와서 귀속재산은 한국의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선포했고 한미조약(재산협정)도 있으니 이것을 가지고 일본과 가타부타할 것이 없다고 귀속재산 부분에 관해서는 배척했다.
이대통령은 그러나 배상은 청구할 준비를 하되 공개적으로 할것이 아니라 기밀히 하라, 위원회는 법무부에 둘 것이 아니라 기획처에 두라는 하명을 했다.
이래서 기획처 기획국에 「대일배상청구위원회」가 사실상의 의원회로 설치되어 나도 그위원의 하나로서 참가해 그 준비에 참획했다』
홍씨의 말처럼 법무부의 이같은 건의와는 별도로 이순탁기획처장과 나도 이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이를 건의해서 결국 이처장의 총괄하에 이 작업이 진행됐던 것이며 나도 의원으로 참여했다.
여기에서 귀속재산, 즉 패전한 일본과 일본측이 우리나라에서 쫓겨가면서 남긴 재산의 처리과정을 아는것은 앞날의 한일관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의 하나가 되므로 세술해 본다.
일본이 45년8월9일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연합국수뇌의 포츠담선언을 수락한 이후 남한에 진주한 미점령군의 「하지」사령관은 9월25일 군정법령2호를 선포해 한국내의 일본재산처리지침을 처음으로 밝혔다.
이 법령은 일본이 포츠담선언을 수락한 동년8월9일부터 소급해서 일본의 국·공유재산의 이동 및 처분을 금지했으며 사유재산의 처리도 특정한 수속에 따르도록 지시했다.
그러다가 그해 12월6일 군정법령33호를 통해 한국내의 모든 일본재산, 즉 국유및 사유를 막론한 일본재산을 미군정청에 귀속·소유시켰던 것이다.
유엔 총회의 결의에 따라 남한에 총선거가 실시돼 정부가 수립된 48년8월을 전후해 미군정청으로부터 통치 및 행정권이 우리 정부에 이양되자 귀속재산문제의 처리가 제기됐다.
그래서 이대통령은 8월9일 「하지」사령관에게 미군정청에 몰수된 귀속재산을 우리정부에 이양해 달라는 통첩을 발송했으며 「하지」사령관은 이틀후인 11일 이에관한 협상을 하자는 통첩을 보내왔다.
이에따라 정부수립직후 「한미간의 재정및 재산에 관한 최초협정」의 체결협상이 시작됐다.
당시 우리측에서 이범석총리를 수석대표로 장택상외무·김도연재무장관, 이순탁기획처장 및 법제처장이던 내가 대표로해서 고작 별 하나인 미측 수석대표 「헬믹」준장을 상대로 이 협정체결을 위한 협상에 임했던것을 보면 우리가 귀속재산처리 문제에 얼마나 중요성을 부여했었던가를 실감할 것이다.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돼 9월11일 양국대표간에 서명됐고 같은달 20일부터 효력을 발생했다. 우리는 이 협정에 의해 국내 전재산의 80%이상이나 된다던 귀속재산에 관한 완전한 소유권을 취득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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