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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뿐인 노다의 진검승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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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서승욱
도쿄 특파원

무지하게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이다.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일본 총리 얘기다. 전격적인 중의원 해산 방침을 밝힌 14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자민당 총재와의 당수 토론을 그는 이렇게 시작했다.

 “소학교(초등학교) 때 형편없는 성적 통지표를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야단맞을 걸 각오했는데 아버지는 혼내는 대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노다군은 바보스러울 정도로 정직하다’는 생활태도 평가에 아버지는 너무나 기뻐하셨다.”

 8월 야당의 협조를 받아 소비세 인상 법안을 처리하면서 노다는 ‘가까운 시일 내 중의원 해산’을 약속했다. 이후 3개월이 흘렀지만 해산은 없었다. 지지율 바닥인 민주당에 해산은 곧 정권 상실이다. 노다에겐 운신의 폭이 좁았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그에겐 굴욕적 비난이 쏟아졌다.

 자민당은 노다를 ‘거짓말쟁이’라고 불렀다. 이부키 분메이(伊吹文明) 전 자민당 간사장은 “‘노다루(野田る)’라는 새 동사가 생겨났다”고 비꼬았다. ‘노다(野田)’에다 ‘∼한다’는 뜻의 스루(する)를 더한 합성어다. 이부키는 “그때그때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즉흥적인 말을 해놓고 나중에 약속을 뒤집는다는 뜻”이라고 모욕감을 줬다. 우익 언론들은 “‘가까운 시일 내’라는 표현이 2012년 정치권의 최대 유행어”라고 꼬집었다.

 노다는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그는 24년 동안 하루도 빠뜨리지 않은 지역구 전철역 앞 연설로 다져진 ‘연설의 달인’이다. 그런 노다가 11월 초 국회 답변에서 혀가 꼬여 말이 안 나오는 실수를 두 번이나 했다. 참모들은 “총리가 너무 피곤한 것 같다”고 걱정을 쏟아냈다.

 코너에 몰린 노다는 결국 어린 시절의 일화까지 동원해 “난 거짓말쟁이가 아니야”라고 항변하며 해산을 선언했다.

 전격적인 해산에 일본 언론들은 “노다 총리가 휘두른 칼춤에 야당들이 허를 찔렸다”고 표현했다.

 자존심을 지킨 본인의 마음은 후련할지 몰라도 그가 이끄는 민주당은 최악의 상황에 내몰렸다. 자민당에 지는 건 물론 자칫 이시하라·하시모토의 우익 연합군 ‘일본유신회’에 제2당 자리까지 내주게 생겼다.

 선거전이 시작되자 노다는 “자민당처럼 아버지의 지역구를 아들이 물려받는 세습 공천이 민주당에는 없다” “다른 정당들의 우경화 경쟁엔 참여하지 않겠다”며 야당과 차별화에 나섰다.

 하지만 노다가 누군가. 취임과 동시에 전임 민주당 총리들이 표방했던 ‘탈관료정치’를 뒤집었고, 과거사·영토 문제엔 자민당이 울고 갈 정도의 보수색을 드러냈다. 그래서 “노다 정권은 자민당 노다파”란 비아냥을 샀던 장본인이 아닌가.

 민주당에 표를 달라는 노다의 외침이 공허하고, 그가 휘두른 해산의 칼날이 한없이 무딘 이유다.

 민주당 정권이 종언을 고하는 건 상관할 바 아니지만, 극우적인 자민당과 일본유신회가 득세해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릴 것을 생각하니 노다가 너무 원망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