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소설을 쓴 게 아니라 소설이 날 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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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이 당선됐다. 2001년 8월, 첫 소설집을 펴냈다. 분명 빠른 행보다. 신인작가란 모름지기 끊임없는 수련과 연마를 거친 후에 자신의 칼날을 내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 작가의 작품을 폄하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간이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1년이 평생처럼 길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문제는 ‘얼마나 치열한가’다. 만약 이 작가가 그 1년 동안 소설에만 매달렸다면 1년이란 시간은 짧은 게 아니라 오히려 긴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작가의 등단작인 「우리들의 작문교실』이란 작품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뭐, 그렇게 빠른 것도 아니네”라며 고개를 주억거릴지도 모르겠다.

첫 소설집 『론리 하트』(생각의나무)를 펴낸 조민희씨(27)는 1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가물가물하다. 200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작 「우리들의 작문교실』로 도정일, 이문열 두 심사위원의 마음을 쏙 빼앗은 그이지만 그만큼 부담감도 컸다.

「우리들의 작문교실』은 작가가 부담을 느껴야 할만큼 재미있는 작품이긴 했다. 비행접시라 불리는 은아와 친구 위니의 성장과정을 담은 이 작품은 건조한 문체와 의미심장한 이야기들이 보기 좋게 어울려 있다. 심사위원들은 ‘이 작가는 혼자 엄청난 양의 훈련을 거쳤거나 아니면 이야기꾼의 재능을 타고났는지도 모른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번에 펴낸 작품집 『론리 하트』는 등단작 외에도 「녹원의 마담』, 「회전문』등 건조하고 정확한 문장이 돋보이는 작품들로 가득하다.

“왜 그렇게 사람들이 절 믿어주는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첫 책을 빨리 내게 된 것도 주위 어른들이 절 믿어줬기 때문인 것 같아요. 첫 책이 나왔는데 아직 실감은 안나요. 그동안 바랐던 것에 비해서 그렇게 좋은 줄도 모르겠구요. 작년부터 지금까지가 너무 정신없이 지나가서요. 이런 일들이 천천히 이뤄졌으면 좀 실감이 났을텐데.”

오랜 동안 꿈꿔왔던 작가의 길
어린 시절부터 조민희씨의 꿈은 소설가였다. 10살 즈음부터 작가말고는 달리 하고 싶은 게 없었단다. 그 오랜 꿈을 1년 남짓한 시간만에 구체적인 결과물로 완성했으니 스스로도 놀랄만하다. 작가가 되려고 마음먹은 것이 오래 전 일이니 그동안 수 차례 투고했을 법도 한데 등단작이 그의 첫 투고작이란 사실이 의아하다. 그나마 그 작품도 신춘문예에 응모하지 못할 뻔했다.

“작가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되는지 몰랐어요. 신춘문예라는 게 뭘 하는 건지도 잘 몰랐고. 대학 다닐 때 혼자서 계속 장편을 썼거든요. 옆에서 보고 있던 누가 그런 얘길 했어요. ‘왜 혼자 쓰고 혼자 읽고 마느냐, 신춘문예에 응모해봐라.’그때 처음 알았죠. 그때가 11월이었어요. 12월 마감이니까 그때부터 막 쓰기 시작했죠. 다 쓰고 나니까 3백 매쯤 되대요. 이제 내야지 하고 갔더니 글쎄, 분량제한이 1백 매더라구요. 아, 큰 실수를 했구나, 한 해를 넘겨야겠구나 그랬더니 동아일보만 중편이란 게 있더라구요. 되나 안되나 여기밖에 낼 데가 없겠구나 싶었죠. 전 제가 쓴 게 중편인지도 몰랐어요. 단편인 줄 알았지. 80매 정도는 콩트인 줄 알았구.”

조민희씨의 문학수업은 대부분 대학에서 이뤄졌다. 연세대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하면서 마크 트웨인, 허먼 멜빌, 나다니엘 호손, 스코트 핏제랄드를 애인으로 만들 정도로 미국문학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자신만의 장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가가 된 지금 대학시절에 쓴 소설을 보고 있으면 조민희씨는 유쾌해진다. 아직 어리고 성숙하지 않은 생각이 귀엽게 느껴진단다.

소설을 꿈꾸는 시간, 소설을 배우는 시간
대학시절 조민희씨가 쓴 소설은 모두 장편이었다. 80매 분량의 소설이 꽁트라고 생각하고 단편이란 걸 어떻게 써야하는지도 몰랐으니 장편소설을 쓴 건 당연한 일이겠지만 무작정 달려든 것은 꽤나 용감한 일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데뷔 후였다.

“단편이란 걸 처음 쓰기 시작했는데 두 세 개는 단숨에 썼어요. 그런데 어떤 소설은 몇 달이 걸리기도 했어요. 생각이 콱 막혀서는 도무지 풀리지가 않더라구요. 그 콱 막힌 순간이 아마 소설을 배우는 시간이었나 봐요. 쓰면서 많이 배웠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소설을 쓴 게 아니고 소설이 절 쓴 것 같아요. 소설이 절 가르치면서.”

사람들은 조민희씨의 작품에서 수많은 작가의 그림자를 본다. 카프카적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마크 트웨인의 작품을 연상하는 사람도 있다. 아직은 완성된 작가가 아니란 말일테다. 조민희씨는 그 말들을 모두 수긍한다. 아직은 스스로를 ‘읽는 책마다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초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수많은 책들이 조민희씨를 종이 삼아 그 위에다 소설을 쓰고 있는 셈이다. 스스로 종이가 되어, 스펀지가 되어 소설을 받아들이는 그의 모습은 언젠가 야무진 손끝에서 뿜어져 나올 그만의 ‘진짜’ 소설을 기대하게 한다.(김중혁/ 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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